나는 이제 간도 없다. 쓸개도 없다. 영주권만 주면 그래 그놈의 영주권만 준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정말.
영주권이 없는 나는 캐나다에서 동물보다 못한 존재. 앞집 강아지보다 옆집 고양이 보다 못한 존재. 외국인 노동자. 그나마 다행인 건 캐나다에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대라는 게 그렇다.
"어 내가 생각한 캐나다는 이게 아닌데."
원래 인생이 그렇다. 생각처럼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이란 걸 하지 않게 되었다. 뇌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일터로 나선다. 그래야 상처를 덜 받는다. 같이 일하는 애들 한 명이 나에게 뭐라고 했다. 뉴펀들랜드 악센트가 워낙 셌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몇 초 동안 멍하니 걔 얼굴을 봤다. 무슨 단서라도 찾을까 싶어.
"아니, 영어도 못 알아먹는 애를 대체 어디서 데려온 거야. 쏘 스튜핏." 웃는 얼굴에 그래 내 웃는 얼굴에 걔는 침을 뱉었다. 카아아악 가래침을, 누렇고 끈적거리는 가래 같은 인성을. 화가 났다. 아니 이봐 뭐라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걔한테 말을 왜 그렇게 하냐고 대들진 못했다.
난. 영어도 못하고
난. 영주권도 없고
난 돈도 없고
난 차도 없고
난 여기서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발에 걸리는 돌멩이만 걷어차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런 일. 무너진다. 몸이 스르르 녹아버려 촛농같이 녹아버린다. 서둘러 내가 사는 반지하에 몸을 숨긴다.
여긴 안전해. 여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야. 그래 그래도 이런 곳이 있잖아. 내가 나를 두 팔로 안아준다. 괜찮아. 생각하지 말자. 그 문어마녀 같은 애가 한 말 생각하지 마. 영주권 나올 때까지만 버티는 거야. 그럼 이 지긋지긋한 섬마을을 벗어나는 거야. 그때까지 뇌를 꺼내서 냉장고에 넣고 출근하는 거야. 쟤네가 뭐라고 욕을 하던. 뭐라고 비웃던 나는 쟤네랑은 다르잖아.
나는 용감하잖아.
그래서 한국을 떠나왔잖아. 그건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었어. 그러니까 누구 말처럼 쟤네가 나를 깎아내리면 나는 날 조각이라고 생각하면 돼.
영주권 나올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조금만 버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