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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울 연 Oct 14. 2024

책임에 관하여

알바에서 매니저가 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더 넓게 몸소 느끼고 있었다.

직접 배우던 입장에서 이제는 가르치는 위치가 되면서, 내가 이전에 했던 작은 행동들까지도 책임감 있게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닐까, 잠들기 전 오만가지 생각이 스친다. 덕분에 다음날 더 열심히 일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긴 하지만.     


매일매일 출근하며 지각하지 않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10분씩 일찍 출근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성실함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100번 중 100번은 꾸준한 행동이어야 하기에, 알바를 교육하다 보면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은 하나같이 출근 시간보다 이르게 온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점장님은 면접을 보고 항상 나와 상의하신다. 알바가 시식 코너도 아니고 하루 써보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 항상 신중하게 사람을 뽑아야만 했다. 내가 직접 면접을 보는 건 어떤지 제시도 하셨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선임자였을 시절과 매니저 시절을 통틀어 생각보다 많은 내 데이터 기반에 의하면 첫인상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그걸로 단정 지을 순 없다는 통계가 있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외모적인 부분의 첫인상을 본 게 아니다.


눈은 잘 마주치는지, 이력서는 가져왔는지, 이력서를 어디에 가져왔는지, 이력서를 접어서 가져왔는지 사진은 붙어있는지 등등 생각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여러 기준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외모적인 첫인상과는 다르게 이런 기준들이 실제로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첫인상도 괜찮고 매일매일 일찍 출근하는 ‘이알바’는 어느 날 갑자기 잠수를 탔다.

선임자부터 매니저까지 카페 인생 통틀어 알바가 잠수를 탔던 건 처음이라 뒤통수가 얼얼했다. 출근해서 아프다길래 조퇴도 시켜주고, 알바의 사정이지만 내 스케줄을 조정해 가며 쉬는 날을 만들어주고, 퇴근길엔 맛있는 빵도 챙겨서 보냈는데 결론이 이거라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모든 연락을 무시하더니 자기 딴에는 나름 죄책감이란 게 있었던 건지 카톡이 왔다. 카톡에 쓰여 있는 수많은 글자 속에서 뇌리에 박힌 문장은 ‘비록 짧았지만 같이 일해서 즐거웠습니다.’는 말이었다.

즐거웠다고? 이게 즐거웠다는 말이구나?     


이알바가 갑자기 그만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일 외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알바’처럼 나도 요즘 세대에 속하지만, 직장 내에서의 책임감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일을 삶의 일부로만 여기며 살아가는 동안 나는 이곳에서의 작은 역할이라도 책임감 있게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아마도 내가 매니저로서 이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경험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같은 세대이지만, 나는 책임감에 더 무게를 두는 쪽을 선택하게 된 것 같다.     


처음엔 아르바이트생이 갑자기 그만두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매니저로서 느끼는 책임감은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내가 이들의 퇴사에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자책까지도.

같이 일하던 사람이 자주 바뀌다 보면 잘못이 나한테 있진 않을까, 그만두는 이유가 나 때문은 아닐까 하고

책임의 화살을 애꿎은 나에게 꽂았다.


지나간 사람들 중 정말 그만둔 이유 중 하나가 매니저가 너무 갈궈서, 매니저가 너무 싫어서, 매니저가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뭐 이런 이유들이 하나쯤 있을 거라곤 생각한다.     


매니저가 되고 한창 알바에 스트레스받을 때 점장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다.

돈을 주는 건 우리 입장이지만 갑을을 따졌을 때 절대 우리는 갑에 있진 못하다고, 갑자기 그만두거나 잠수를 타면 돈은 무조건 줘야 하지만 결국에 고생하고 더 일해야 하는 건 우리가 되기 때문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린 을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엔 속으로 ‘에이 그래도 점장님은 갑이지.’ 생각했는데 다 맞는 말씀이었다.


매니저라는 직책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도 아니며 시급을 계산해 가며 시간만 때우고 싶어 하는 알바는 더더욱 아니다.     


‘말에 실었던 짐을 벼룩 등에 실을까’라는 속담이 있다. 


나는 알바였다. 다른 추가적인 면접도 없이, 질문 단 하나 없이

매니저가 되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직장이 생겼다.


작다면 작은 카페이지만, 내가 만약 ‘이알바’나 다른 알바들처럼 일하면서 성실함이라는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난 모습을 자주 보였다면 아마 고민해 본다고 하셨을지도 모른다.     


나는 카페 매니저다.

의사, 약사, 간호사처럼 이름만 들어도 누가 봐도 ‘직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직업이 많지만, 카페 매니저는 그에 비해 묘하게 애매한 포지션이다. 바리스타도 아니고, 사장도 아닌, 그런 직책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게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그저 내가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는 내가 좋다.    


 



그런데 때때로 현실이 나를 다시 깨닫게 만든다.     


어느 날, 협업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원두 관련해서 좋은 제안드리고 싶은데, 우선 매장에서 받아보시고 맛보신 다음에 상의하실 수 있도록 먼저 샘플...”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좋은 제안이고 나쁜 조건은 없네 하는 그런 계산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문의하신 분이 더 입 아프게 말하지 않게끔 내가 사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을 끊고 밝혀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장님이 아니라 매니저라서 나중에 연락 다시 드려도 될까요?”     


“아~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꼭 사장님 아니셔도 맛만 보셔도 되는 거니까 부담 가지시지 말고 매니저님께서 결정하셔도 됩니다. 원두 받아보시는 거 어떠실까요?”     


사장님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장님'이라고 불린다는 게 낯설었다. 그렇다고 그 말을 바로 잡으며, "저는 매니저입니다, "라고 말할 때 느껴지는 공허함이 없었던 건 아니다. 순간, 나는 내가 매니저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장이 아니라는 현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매장에선 모든 걸 내가 결정하고 관리하지만, 결국 나는 점장님이 정해주는 틀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내게 주어진 책임은 컸지만, 그 위에 또 다른 책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나는 더 커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퇴근 후 아빠와의 통화는 나를 잠시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오늘 알바가 갑자기 출근을 안 해서 혼자 하느라 늦게 끝났어, 걱정했나?”     


“내 딸이 너무 못살게 굴었나?”

아빠는 지친 내 목소리를 듣고 농담을 던졌다.     


“아빠 딸이 그랬겠어?”

라고 웃으며 받아치는 나였지만, 생각이 많았다. 진짜 그랬을까?


친절하게 대해도 무례하게 나오거나, 조금이라도 단호해지면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나는 중심을 잃을까 봐 조심조심 걷고 있는 기분이다.

모든 걸 책임지고 싶지만, 그들이 떠나는 순간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자책하게 된다.

이런 나를 지켜보는 점장님과 아빠는 나보다 더 단단해 보이지만,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아빠의 농담은 마음을 살짝 풀어주지만, 내 머릿속엔 여전히 그 경계선 위를 걸어가는 내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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