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카페는 카드 리더기가 포스기에 붙어있어서 직접 카드나 현금을 받고 있다.
카드 결제를 하던 중, 두께가 남다른 시커먼 카드가 눈에 띄었다. '이게 카드 맞나?' 싶을 정도였다.
과장을 조금 하자면 힘껏 눌러봐도 부서지거나 휘어질 리 없을 만큼, 카드의 두께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게 카드가 맞나 이렇게 두꺼운 게 있다고?
내 얼빠진 표정이 그대로 나와서 약간의 부끄러움과 함께 빠른 속도로 결제했다.
매장을 떠날 때 쯤 손님이 물어보셨다.
“혹시 빵은 내일 발뮤다에 데워먹어도 되나요?”
“네? 발뮤다요?”
버뮤다 삼각지대는 알아도 발뮤다는 살면서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단어이려나. 근데 문맥상 에어프라이어랑 비슷한 어떤 기계가 아닐까, 근데 그런 기계라고 해도 모르니까 된다 안된다 말 하기가 어려운데 어쩌지’하는 생각을 30초 정도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아 아닙니다! 알아서 해 먹으면 되겠죠! 수고하세요.”
얼굴이 약간 화끈거림을 느꼈다. 손님이 나가자마자 발뮤다를 검색해봤는데 토스트기 치곤 꽤 비싼 가격을 하고 있는 기계였다. 아는 척 않고 아무런 대답도 안 한 채 망설인 내가 다행스럽기도 하고.
사람에게 풍기는 분위기나 여유 같은 건 노력해도 숨겨지거나 바꿀 수 없다.
얼굴에 그늘 없이 고생 한 번 안 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란, 그런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냥 부럽다.
다른 날 7500원짜리 디저트를 구매하는 손님에게 현금을 건네받았다.
“맛있게 해주세요~ 잔돈은 아가씨 팁~”
당연히 잔돈을 거슬러 드렸지만, 극구 거절하시곤 팁이라며 대리석에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셨다.
왜 나는 기쁘지 않았을까? 잔돈을 팁으로 받는 순간, 내가 궁핍해 보였을까, 아니면 스스로를 그렇게 느낀 것일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를 가장 찝찝하게 만들었던 건 도달한 마지막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못 하는 나 자신이었다.
‘2500원이 아니라 25000원이었으면?’
나도 참 누구보다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에 스스로가 역겨웠다.
그 날 저녁, 시제 정리를 하면서도 2500원을 매장 돈통에 넣을지 내 지갑에 넣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돈은 맞으니 껄끄러워하지 말고 내 지갑에 넣자고 생각했다. 현금을 쓰는 일이 없어서 아직도 지갑 속 고이 자리 잡고 있는 그 돈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면서 10원이든 100원이든 대가 없이 번 돈을 보곤, ‘왜 나는 기쁘지 않았는가’는 손님이 나를 다방 직원처럼 여겨서였을지 금액이 작아서였을지 아직 명쾌한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어쩌면 손님은 순수한 의도로 학생같은 딸 뻘 직원에게 용돈이 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릴 수 있던 건 2500원이 아니라 25만 원이 팁이더라도 정중히 확고하게, 무엇보다 망설임 없이 거절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다. 부자는 그런거지.
사람의 여유는 어디서 나올까?
애초에 질문이 틀렸다.
귀티가 나려면 얼마나 여유 있어 보여야 하는 걸까.
일반화할 순 없지만 많은 사람이 금전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힘듦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부모 잘 만나 고생 한 번 안 하고 커서 좋겠다.’ 따위의 생각보단 어떤 역경을 멋지게 지나왔길래 여유롭고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하는 부러운 마음이 든다.
누구나 인생은 처음이 아니던가, 언젠가 휘청해 봤을 텐데 지금은 어떻게 이렇게 행복할까 붙잡고 방법을 물어보고 싶다.
나이 불문하고 모든 이가 살면서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이 순탄하기를 바라지만, 적어도 인생 2회차가 아니라면 처음 경험하고 맛보는 아프기만 한 자갈길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찾으려면 자갈을 밟아야만 알 수 있다.
아빠는 언젠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다들 살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무거운 돌이 있다고.
서로 누가누가 더 힘든지 비교하면서 “나는 그때 더 그랬어. 뭘 고작 그거 가지고 그래?” 무시하는 상황이 온다면 갑자기 내 돌은 작아지긴 커녕 과시하고 싶어질 만큼 거대해진다. 혼자서 내 고민들과 힘듦을 부둥켜 안고서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지를 바라보곤 했다.
타인이 내 힘듦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동시에, 나는 역설적으로 내 힘듦을 작게 보고 “이게 뭐라고 이렇게 무너져?”라고 타박하기도 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가장 높은 낭떠러지야. 내가 제일 힘들어.” 결국 누가 가장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겨루고 싶어한다. 땅에 묻힌 사람들이나 하늘에 가버린 사람들이 봤을 때는, 우리는 결국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내 힘듦이 남들에 비해 작다고 위축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나 남에게 "고작"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말자는 것이다.
모두 인생은 처음이고, 가보지 않은 길이 많기에 모든 순간이 고비로 다가올 수 있다. 우리의 힘듦은 결코 작지 않다. 남들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쓸데없는 고민이 아니다. 자신조차 가볍게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힘들면 잠깐 쉬었다가 일어나면 된다. 일어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아빠 나 오늘 팁 받았다~ 손님한테~”
“얼마?”
“얼마인진 당연히 비밀이지 아빠?”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어른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