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울 연 Oct 09. 2024

4500원의 권리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엔 갑질이라는 부제가 붙을 수 있다. 금액을 떠나 지불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기에 갑질은 공격적으로 들리지만, 본질적으로는 권한을 누리겠다는 의지일 뿐이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본 나는 누구보다 한 푼 한 푼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갑질에 대해서도 몸소 느껴왔다. 많은 알바 경험 속에서도 금액을 떠나 결제할 때 카드나 현금을 던진다든지, 반말을 한다든지, 택시나 대리를 부르라고 명령을 한다든지 다양한 갑질을 경험해 왔기에 이제는 굳은살이 됐다.

물론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빠삭하게 깨우쳤다곤 안 했다.


솔직히, 나도 헷갈린다. 요구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법적인 문제는 아니다.

진상이라면 진상이지만 잠들기 직전 분해서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진상이라고 취급하기엔 선을 넘지는 않은, 굳이 표현하자면 그 경계를 밟고 있는 애매한 층이 아닐까?     




아메리카노 4500원. 카페에서 가장 저렴한 메뉴이다. 1인 1 메뉴 원칙이 있는 우리 카페는 돈 4500원을 내기만 하면 ‘손님’이라는 권한이 생긴다는 뜻이다. 물론 문을 열고 들어와도 손님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주는 서비스를 누리는 손님을 말하는 것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이 말을 언제 처음 들었더라?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 영화 ‘부당거래 (2010)’     


저출산이 계속되는 사회 속 카페에서 아기를 보는 일은 조금씩 줄어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그럴 필욘 없지만 나는 괜스레 아기와 오는 손님들에겐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하는 것 같다.


하루는 엄마 혼자 걸음마도 못 뗀 아가를, 자기 몸만 한 보부상 가방과 함께 양손에 번쩍 들고 들어오셨다.

우리는 진동벨을 드리는 곳이기에 버릇처럼 진동벨을 드렸고, 아메리카노 한 잔이 준비된 후 나는 자연스럽게 번호키를 눌렀다. 걷지도 못하는 아기를 혼자 두고 잠시지만 커피를 가지러 오는 게 무리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찰나에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아차 하는 생각에 70평 남짓한 카페에서 쟁반을 들고 손님이 계신 자리로 냅다 뛰어갔다.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커피를 드렸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이거 2분만 데워서 가져다주실래요?”     


당연히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행동한 건 아니지만, 아기 이유식을 손에 쥐어 주면서 전자레인지에 2분 정도 데우고 가져다 달라는 말이 돌아왔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호한 기분이다. 어려운 일은 물론 아니었다.

무엇보다 거절할지 말지 고민의 대상이 못됐다. 커피는 갖다 줘놓고 이유식을 이제 와 안 갖다 준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까 그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카페 안쪽 자리엔 꽤나 프라이빗하고 넓은 좌식 공간이 있다. 주로 아이들과 오신 손님들이 애용하는 곳이다. 프론트 쪽에선 보이지 않아서 가끔 외부 음식도 서슴지 않고 드시기도 하고 누워계시기도 한다.

어느 날엔 약간 죄송스러워하는 낯빛으로 쟁반을 반납하시면서 쓰레기를 어디에 버려야 하냐고 여쭤보셨다. 아까 안쪽에서 동년배 친구들과 그의 아이들 모임을 한 손님이었다.


쓰레기통은 화장실을 제외하곤 손님이 이용하는 공간에 따로 없어서, 반납하시는 곳에 두시면 우리는 그걸 주방에서 정리하는 형태이기에 평소처럼 대답했다.     


“어, 저 주시면 돼요!”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손님 앞으로 내밀었다.     


“아 좀 많아서요...”     


“저희가 바깥엔 쓰레기통이 따로 없어서요, 저 주시면 저희가 치우고 있어요~”     


“그러면 이따 나갈 때 여기에 둘게요!”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곤 바쁜 주말이었기에 뒤돌아 다른 일들을 처리했다. 잠시 뒤 다시 뒤돌아선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할 쓰레기들을 치워야 했다.


많은 쓰레기 사이 가장 눈에 띈 건 아기 기저귀였다.     


우리 주방은 오픈 식이라 손님들에게 쟁반을 드리고 반납하는 곳과 전부 맞닿아 이어져 있는 대리석이다. 따끈한 기저귀라면 아까처럼 대답하진 않았을 텐데, 손님이 왜 망설였을지 생각해 볼걸.

매장 내에 화장실이 없는 게 아니다. 기저귀가 여기 있다는 건 좌식에서 기저귀를 갈았다는 사실이고.

같이 일하던 비위가 약한 김알바는 눈으로 욕을 담았다.

아까 그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손님이 느끼기에 ‘거절한 내가 불친절하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 반 ‘영영 우리 가게를 안 올까 봐’ 걱정 반으로 불필요하고 제공하지 않는 서비스인 점을 전부 알고 있음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친절한 직원이고 재방문을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저번에도 해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해주겠지 라며 같은 행동을, 어쩌면 더 많은 권리를 누리려고 하면 어쩌지.     



오늘도 역시 고단한 하루였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어김없이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 오늘은 주말이라서 너무너무 바빴어.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퇴근하니까 이제야 힘이 드네?”

     

“주말엔 당연히 더 바쁘지. 오늘도 뭐가 있었구먼?”     


“아냐 그냥. 나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조금 헷갈려.”     


“원래 세상엔 별별 사람이 다 있어. 아빠가 항상 말하잖아, 똥을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기저귀 얘기는 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똥을 얘기하는 아빠가 약간 소름 끼쳤다.

알고 말씀하신 건 아니겠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그 말이 더러움을 피해 가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감정적으로 매 순간을 겪지 않고 넘기는 법에 대한 조언처럼 들렸다.

모든 걸 너무 진지하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씀이셨을까?     




다른 날 저녁, 손님이 아무 말 없이 주먹을 쥐고 나에게 손을 뻗었다.

여느 날처럼 당연히 쓰레기인 줄 알고 양손을 모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손님 앞으로 내밀었다.

아버지 뻘의 중년 남성이었던 손님은 나에게 누룽지 맛 사탕을 두 개 주셨다.

“맛있게 먹어요~”라고 하시며.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내가 인상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아서.


사탕 하나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 내가 얼마나 작은 친절에도 마음을 닫아왔는지 깨달았다. 마치 손님이 내게 거울을 비춰준 것처럼, 내가 무심코 그들을 판단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다양한 갑질이 어린 나이에 굳은살이 되어준 건 맞다.

그 굳은살이 상상치 못한 일을 겪을 때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넘길 수 있는 멘탈을 길러준 것도 맞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넘기며 사는 게 맞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이렇게 살겠지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결국 내가 제공한 불필요한 서비스는 무조건적으로 친절했다.

그럼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혹시 이런 경험들이 내게 더 큰 여유와 관용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다양한 손님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는 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 기대해 본다.     

이전 02화 (안) 죄송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