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고, 말하고 싶지 않은 나의 고민들 사이에서하루종일 시름을 하며 일을 겨우 마쳤다.
그동안 알고 지낸 동생이 갑자기 밥을 산다고,
오늘 함께 저녁을 먹자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밥을 먹겠다 했는데 퇴근할 때 되어서 집에 가려고 하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밥집으로 향했다.
얼른 밥만 먹고 가야지!
주차를 하고 식당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주차할 곳도 없고
퇴근시간이라 차도 엄청나게 많다.
복잡한 차들을 뚫고 주차를 했다.
아휴~ 이제 식당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몸이 의자에 붙어있는 것 같다. 차를 제대로 주차한 건지 정신이 그냥 몽롱한 것 같이 느껴진다.
문을 열라고 하는 순간 창가에 어느 남자가 붙어 서있다. 몽롱한 정신에 순간 귀신을 보는 줄 알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온몸이 부들 떨렸다.
'아니, 왜 그러고 서있어! 깜짝 놀랐잖아'
너무 놀랜 나머지 차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내가 도착하면 주차를 봐주려고 큰 길가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솔직히 동생들과 있으니 음식을 미리 주문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그가 내 차옆에 딱 서있으니 놀랄 수밖에..
사람이 가득 차있는 식당에 들어가니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동생들이 있다.
몸은 피곤해도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인사를 나누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그가 쑥스럽게 꺼낸 빼빼로다.
'오늘이 빼빼로 데이더라...'
오늘 사람을 놀라게 해도 분수가 있지, 해가 서쪽에서 떴나. 화이트데이라고 사탕을 사달라고 할 때는 평생에 그런 거 한적 없는 경상도 사나이라더니;; 세상에나! 이 사람 나한테 실수한 거 있나? 뭐 부탁할 거 있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난 그때까지만 해도 오늘이 빼빼로 데이인 줄도 몰랐다. 내가 모르는 빼빼로 데이를 그가 먼저 챙겨서 빼빼로를 줬다고??? 오늘 사람을 두 번이나 놀라게 하네..
그는 이벤트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는 뼛속까지 경상도 남자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남자 형제만 있는 곳에서,
남자 of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전통 누아르의 삶을 동경하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행동은 큰일 나는 것처럼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벤트라는 것은 기대할 것도 없고 기대해 봐야 섭섭한 것은 나뿐이고
섭섭해봐야 나만 속상하고 내 손해겠꺼니 하고 빼빼로가 뭐냐, 사탕이 웬 말이냐
그거 다 상술이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무덤덤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생일을 더 챙겨야 하고, 어버이날, 명절을 더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는 살을 오래 맞대며 살고 있는 부부나
권태기가 올 것만 같은 오래된 연인들에게 꼭 필요한 날이 아닐까 싶다.
파티가 없는 우리나라의 정적인 문화에 소소한 이벤트데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젊은 연인들은, 이제 막 시작하는 풋풋한 사랑을 하는 사랑이 샘솟는 연인들은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매일이 이벤트가 아니던가!
오랜 시간 살 맞대로 살고 있는 부부나 연인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서로의 존재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이벤트데이는 참 중요하다. 내가 너를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을 가끔은 이런 날이라도 표현하면서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느끼는 것은 삶의 활력이 될 수 있다. 서로 알고 있지만 말로 표현하는 사랑한다는 표현은 사랑받는 이도, 사랑을 주는 이도 자존감이 높아지는 기분 좋은 도파민이 나오는 일이다.
그냥, 매일 사랑한다고 모든 것을 표현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말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그런 무뚝뚝한 그들에게는 이런 이벤트데이가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런 날이 좋은 날, 핑계 삼아 사랑하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다면.
쑥스럽지만 얼렁뚱땅 이벤트로 소중한 순간으로 추억을 만들어가면 우리의 삶이 풍성해진다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