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내면 속에서,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뭔지 모를 화가 계속 억누르고 있었고, 붕붕 떠서 집에 있어도 편하지 않고 너무 불편했다. 가족들 모두 속이 답답해도 말하지 못했고 속앓이를 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매일 아팠다.
떠나버린 아빠와 함께 살았던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 모두 불편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내 욕심에 흔적을 지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대구가 싫었다. 호주비자가 리젝 되어 떠밀리듯이 온 곳이었다. 서울을 떠난 것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세탁되지 않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던 것처럼. 다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정한 시기를 보니 막내가 학교 들어가기 전이 딱 좋을 것 같았다. 이사를 준비했다. 무조건 움직여야만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어리니까 새로운 곳에서 적응을 어른인 우리보다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아이는 친한 친구와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매일 눈물바람이었고, 이사를 하는 바람에 핸드볼도, 태권도도, 컴퓨터학원도 못하게 되었다며 속상해했다. 이사하고 저녁마다 가위에 눌리고 무서운 꿈을 꾸기도 하고,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무서워하기도 했다.이사를 자주한 큰아이에게 제일 미안하다.
둘째는 나는 본체만체하고 다른 여자어른들을 더 따랐다. 나랑은 손도 잡지 않고 날카롭게 신경질을 부렸지만, 올케나 친구의 엄마들 손을 잡고 다정하게 행동했다. 다른 사람에게 집착을 하다 헤어질 시간에는 온갖 신경질을 나에게 부렸다.
막내는 남자아이들이 싫어서 길가에서 남자아이들을 마주치면 숨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짝꿍이 남자애라 학교 가기 싫다고 울어서 학교에 전화해 짝꿍을 바꿔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괜찮아질 거다, 괜찮을 거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천번을 되새겼다.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기만 한 지, 좀 빠르게 이 힘든 시간들이 흘러가면 좋겠다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인지 멈추지 않는 시간은 무조건 흘러갔고 그 시간이 위로를 해주었는지 우리도 새로 이사 온 곳에 조금씩은 적응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니면 모두 힘든 마음은 한쪽으로 접어두고, 화는 안에 접어두고서, 혹시나 건드려지면 터질 수도 있는 폭탄을 안고서, 불안하지만 참고 있었던 듯하다.
세종으로 이사 온 해 가을 엄마 생신을 맞이해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우리 가족이라 함은 '한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 가족이다.'라는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고 우리는 한부모 가족이지만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암시를 주고 싶었던 교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의 성급한 생각이었을까? 아무 말 없지만 우리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이제 더 이상 아빠는 없어.라고 이혼가정임을 인정하는 우리 가족의 정의를 정리하는 '의식'을 치렀다.
다 같이 예쁘게 단장을 하고 웃고 있었으나,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을까? 액자에 넣을 사진을 고르는데 밖에서 큰소리가 났다. 차 안에서 둘째와 큰아이가 주먹다짐을 했다. 얼굴에 상처를 보자마자 정신이 잃었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야단쳤다. 너무 화가 나서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뭐 하는 곳인지 누가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고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왜 싸웠고,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질문과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큰아이에게 아빠를 대신해 동생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직 큰아이도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생들보다 더 의젓하고 듬직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생들과 철없이 싸우는 것을 보고 난 이성을 잃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일까,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거 같은데 왜 나한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난 걸까, 우리는 왜 화목한 가족이 될 수 없었던 걸까? 아이들에게 미안하면서도 원망과 분노의 섞인 울음이었던 것 같다.
지켜보던 동생이 조용히 큰아이를 차로 데리고 가서 조용히 달래주었다.
‘누나가 괜찮아야 아이들도 괜찮아져. 요즘 이혼 아무것도 아닌데 네가 힘드니까 다 힘들어하잖아.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 다 좋은 방향으로 가는 거야.’ 동생의 말을 계속 곱씹고 또 곱씹었다.
가장의 무게
작던 크던 우리는 변화를 겪으면서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간다는 것을 내가 감당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었나 보다.
혼자 가족을 지키는 책임감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이혼 후, 나의 위치가 달라졌음을 깨달았지만, 그 변화를 버텨내는 힘을 키우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압박했고 짓누르고 있었다. 지친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내가 지쳐서 다른 이들의 상처를 볼 여유조차 없었다. 집에 들어와 침대에 몸을 눕히면 이불 안으로 몸이 스르륵 녹아내려 가는 기분이었다. 아빠의 부재를 채워주기는 커녕, 엄마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것 같아 선택한 이혼이었다. 가족들은 나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으니 나와는 다른 상처를 갖게 되었다. 내가 한 선택으로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지만 모든 것이 내 마음처럼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나는 24시간 심장이 쿵쾅거렸고, 멈추지 않는 불안 속에서 머물러 있었다.
가족사진이 나왔다. 웃고 있는 사진 속의 나는 마치 그 순간에 갇힌 인형 같았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였지만, 그 웃음 뒤에는 지친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웃는 모습으로 시간이 멈추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웃으니 모두 웃었다. 동생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내가 괜찮아져야 모두가 괜찮아진다.
그래, 나 역시도 잘못한 것이 있겠지, 관계의 흐트러짐에는 한쪽에서만 잘못하는 경우는 없을꺼야.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너랑 나랑 그냥 안 맞았던 거였겠지. 맞춰가 보려고 했었으나 안되었던 것이고
각자의 삶에서 행복한 것을 찾으려고 이렇게 까지 흘러온 것이었으리라, 분명한 유책사유가 있었지만 나 역시도 반성할 부분이 있었으리라, 내가 모든 것을 남탓하며 원망하고 있으니 해결이 안 되는 것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