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들은 새로운 곳에서도 여전히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내심 뭐가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웃기도 하고 조금씩 차분해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조용히 그렇게 우리의 자리를 찾아가면서 시간이 흐르다 보니 상처는 아물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원래 그 자리로 돌아가고, 그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이 식사자리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얼굴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어서 딱 안 가고 싶었다.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괜한 감정소비를 하는 것이 피곤했다. 아침에 아이들이 아빠와 면접교섭을 간날이기도 했었다.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짜증 내는 일들이 있었기에 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이전에는 형님이 오라고 하면 가는 그 자리가 어떤 영업의 자리가 될까 싶어서 마다하지 않고 갔었는데 그냥 지치는 것 같다. 이혼하고 안쓰럽다는 눈빛과 열심히 살고 있으니 도와주고 싶다는 뉘앙스의 상투적인 안부조차도 난 듣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뵙는 분들도 계셔서 인사만 하고 일어서려고 했었는데 누군가 묻는다.
'애들은 잘 크고?'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흘려 대답하다가 순간 머리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이 스치며 들었던 생각이다. '나와 상관없는 보기 싫은 저 사람들과도 억지로 술자리를 하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 모자란데 나는 지금 뭘 하며,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나와는 악연일지라도 아이들에겐 아빠였을 텐데, 내가 웃지도 않고 인사도 없이 면접교섭을 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다닐 때 친한 친구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아는척하면 좀 기분이 별로인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니까 중간에서 끼여서 불편한 것처럼. 아이들도 면접교섭 때마다 그랬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이들이 짜증이 났던 걸까?
여름방학 면접교섭은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보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나의 일정이 들쑥날쑥해서 조율을 하다 보니, 제주도에서 3일은 아빠와 3일은 나랑 시간을 보내는 스케줄이 되었다. 아이들끼리 먼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넘어가 아빠와 3일 시간을 보내고, 나는 시간 맞춰 제주도로 갔다.
처음엔 면접교섭 날짜에 딱 딱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만이었고, 아이들과 약속 한 시간은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괘씸했다. 그런데 어쩌랴,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있고, 그때마다 부르르 떨며 흥분할 일은 아니지 싶었다. 조금은 내입장보다는 아이들을 먼저, 상황을 먼저 고려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술자리에서 불현듯 생각난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엔 그에게 톡도 미리 보내두었다. '이번엔 그냥 가지 말고 아이들 키워주시는 엄마한테도 인사하고, 나한테도 인사하고 가, ' 알겠다고 답변은 왔지만 솔직히 반가운 상견은 아니었다.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도록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3일 동안 아이들 옷을 빨아서 짐 싸서 보냈던 그대로 짐을 정리해 넣었다며 아이들과 무엇을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하고 싶었던 스킨스쿠버 다이빙 사진을 보며 누군지 맞춰보라고 하기도 하고, 신기한 경험들을 이야기하며 웃고 또 웃었다. 오랜만에 짧지만 함께하는 시간에 아이들은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아빠와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불편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잘 가~ 다음에 봐'라고 인사하는 동안에도 힘들거나 불편한 내색도 없었다. 그냥 그저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인사했다. 자연스럽고도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데 나는 마음으로 울었다.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인 나보다 훨씬 더 대견하고 대단하고 고맙고 미안했다.
그날 저녁 아이들은 달라졌다.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계곡에서 놀던 사진을 보여주며 물놀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튜브가 터진 사건, 구명조끼도 없이 바다수영을 하고, 다이빙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나라면 위험하다고 구명조끼 없이 수영은 절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인스타에 계곡에서 아빠와 함께 나눈 대화를 올리기도 했다. 아빠랑 같이 갔던 계곡 중 또 가고 싶은 곳을 아빠한테 전화해서 묻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아빠랑 통화를 했다.
그동안 아이들이 그리고 나 역시도 많이 자란 탓도 있으리라, 꼭 엄마와 아빠가 아이들을 보는 앞에서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고 좋아졌을 까 싶기는 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계기로 아이들도 더 이상 아빠와의 만남에서 엄마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라는 것만큼은 인지한 것 같다. 아이들은 아빠와의 관계가 더 이상 엄마와 할머니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한 듯했다
그날 이후 엄마도 '내 딸 맘아펐던거 생각하면 화가 뻗쳐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 나지만, 애들 보니까 좋아진 것 같아서 나도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아.'
큰아이는 아빠한테 전화해서 몰래 용돈을 받기도 했다. 둘째는 아빠와 다음 면접교섭 때는 사우나를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막내는 혼자서 수영복 혼자 갈아입기 힘들다며 툴툴거리면서도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아이들은 확실히 편해진 것 같았고, 나 역시도 조금씩 더 편안해져 갔다. 참으로 다행이다.
편안한 마음은 삶의 질을 달라지게 한다.
여행의 여독을 풀고자 가족들이 모두 할머니가 좋아하는 샤브샤브 식당을 걸어갔다. 집에서 4블록은 걸어야 해서 매번 차로 이동했었는데 그날은 걷고 싶었다. 걸어가는 동안 햇볕을 피하며 장난을 치면서 우리 가족은 "진짜로" 웃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짜증 한번 없이 웃으면서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주었다. 할머니는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웃으니까 너무 행복하다'라고 하셨다. 정말 오랜만에 모두 편안한 식사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행복했다. 매일 싸우지 않아도 분위기가 서늘했던 우리 집이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편안한 마음가짐이 이렇게 삶의 질을 달라지게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상간녀소송을 하는 동안, 결혼생활동안 우리 가족들은 모두 서로에게 상처받았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가 남듯이. 우리는 저마다의 흉터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볼 때마다 욱신거리겠지만, 조금씩 무뎌지면서 회복되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변화 같은 건 없었다. 마음가짐만으로 변화되는 것도 없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또 그렇게 경험으로 알아가고 배우면서 천천히 조금씩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