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볼모로 또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빠와 만나는 시간 면접교섭
이혼을 하면 모든 게 정리되고 편안해질 거라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그 각오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혼하면 잘 지내리라 막연한 기대를 했었던것과는 다르게, 우리 가족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아이들은 불안했고, 무서웠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 아빠가 해결할 방법을 찾아봤지만 안 돼서 따로 살기로 했다. 하지만 너희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아빠를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어.” 상투적인 멘트 같지만,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조금도 거짓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봐도 결코 기분 좋은 말투와 표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볼모로 다투고 싶지는 않았고. 아이들에게서 아빠가 없어졌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계속 답답하기만 했던 나는 분노했다.
부모는 아이를 소유할 권리는 없다.
아이를 무조건 지켜야 하는 책임감이 있을 뿐이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따로 놀았다. 진정되지 않았던 분노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무언가 말하고 싶어도 나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이 부분은 마음이 참 아프다. 이혼하면서 받아야 하는 상처가 나뿐 아니라 온 가족들의 몫이었다.
조정이혼을 할 때는 부부간의 협의할 것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의 양육은 누가 할지, 면접교섭은 언제 할지, 양육비는 얼마나 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 협의를 한다.
어른들의 이혼으로 아이들이 상처를 덜 받기 위해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조건에 맞춰 어른들의 빠른 합의를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한 달에 2회 토요일은 아빠와 면접교섭
나머지는 그때 상황에 맞춰서 조정을 하는 건 당사자들의 몫이다. 매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한 달에 1번 정도 왔었다. 보고 싶고 반가울 것 같은 만남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면접 교섭을 하고 오는 날이면 그렇게 날이 서있었다. 뭐가 그렇게 불편한지 서로 계속 툴툴거리기 바빴다.
막내는 계속 가기 싫다고 울고, 둘째는 밥도 안 먹고 화만 내고 있고, 큰아이만 무덤덤하게 있는다.
눈치 보는 할머니와 나는 아이들이 아빠를 만나는 시간 동안 불안해하면서 집안에서 꼼짝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빠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무엇을 하고 왔는지 물어도 돌아오는 건 짜증이 잔뜩 있는 대답뿐이었다.
울고 있는 막내에게 아빠는 너를 사랑하니까, 보고 싶으니까 온 것이라며 달래주고 맛있는 거 먹고 오라며
달래서 보냈는데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고, 아이들끼리 싸워서 집으로 간다고 울면서 전화가 와서 중간에 다시 집으로 오기도 했다.
지금은 마음이 힘들어도 아빠를 주기적으로 만나면 좋아질까 싶어서 꾸준히 면접교섭을 진행하기를 바랐다. 돈이 없다며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오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만, 최대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은 무조건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이혼을 했다고 해도 관계를 끝이 나는 것 같지 않아 나도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도대체 아빠랑 있으면 뭘 하고 오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답답했다. 이전에는 안 그랬는데, 아빠랑 노는 시간을 좋아했었는데, 한 달에 한번 오면서 아이들 마음도 못 달래주나 싶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자식들만 불쌍해지는 것 같아서 면접교섭을 안 하는 것이 나은 건가 싶었고, 나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그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쌓여만 갔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본인들이 원할 때 부모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아빠가 옆에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오지 못할 것을 알고 먼저 포기하고, 엄마는 늘 바쁘니까 말하지 못할 것일 수도 있으리라. 아이들은 화가 나있는 본인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왜 그러는지 알수도 없는 화가 계속 쌓여만 갔던 것이 아닐까? 불편한데 말하지 못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들이 계속 싫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아이들 마음을 헤아지리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분노에 가득 찬 바쁜 엄마에 불과했다. 면접교섭날만 되면 불안했지만 보내놓고 기도했다.
'괜찮아질 거야. 우리 모두 편안해지는 날이 올 거야'
부디 모두가 평온하길 진정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