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가족 형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
가끔씩 만나는 아빠가 가족인지, 이혼했으니 가족이 아닌지 아이도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막내의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이 아이의 마음을 덜 아프게 할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가족은 단순히 피를 나눴다고 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몰라. 한 핏줄로 가족을 나열하라면 삼촌이랑 예빈언니. 예주. 숙모. 엄마랑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까지 다 쓰는 건 맞는 거 같은데, 거기 쓰는 건 같이 사는 걸 의미하는 거 같아. 그럼 가족엔 할머니. 엄마. 오빠들이랑 써야지. 근데 달록이는 가족 아니야?"
막내는 단순히 궁금해서 물은 것 같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어떻게 해야 아이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뒤섞였다. 이혼 이후의 '가족'이라는 정의는 단순한 혈연이나 동거 여부를 넘어서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막내의 질문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큰아이가 자꾸 친구들을 툭툭 치거나 장난을 심하게 건다는 연락이 학교에서 오기 시작했다.
친구를 건드려서 넘어지기도 하고, 장난을 치다가 안경이 떨어져서 얼굴에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고 주의를 줘야 할 것 같다는 선생님의 연락을 처음 받았을 때는 가슴이 털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춘기라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반복되는 것 같고, 나와 성향이 다른 큰 아이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말과 큰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것뿐이었다.
남자아이라서 서열 싸움을 하는 건가? 아니면 마음속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부반장을 할 정도로 친구들과 잘 지낸다고 하는데, 자꾸 친구를 건드리는 문제가 생기는 건 또 왜 그러는 건지 답답했다. 주변에 조언을 구해도 뾰족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한날 우연히 티비를 보다가 "한부모가정에 자란 아이의 마음"이라는 프로를 보게 되었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생활이 변경된 아이들. 그들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은 채 한부모와 살게 되며 달라지는 모든 것들을 아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어릴 적엔 아빠와 엄마와 함께 했었다. 지금은 함께 하고 싶은 본인의 강한 마음이 생겨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이의 마음이 키포인트인데 이것을 우리는 몰라줬다.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며 무의식 속에 편견이나 자격지심이나 불편한 감정으로 쌓아두고 있다가. 다른 친구들이 부모와 함께한 이야기를 들을 때 본인도 모르게 심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보고 큰아이와 조금 더 깊이 이야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대화를 할 때는 주로 문제의 행동에 대해 주의를 주거나 혼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그저 듣고 공감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학교에서 친구랑 장난칠 때, 너는 기분이 어때?"
큰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냥 재밌어서 하는데... 가끔 친구가 기분 나빠하면 내가 잘못한 건가 싶어."라고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서 아이가 느끼는 혼란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몰랐던 아이의 작은 상처들이, 그저 괜찮다고 믿었던 순간들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큰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보지 못했고 다듬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라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다독일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들 유치원시절은 부모, 조부모, 삼촌, 숙보, 사촌들까지 모두 초대해 즐길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지금은 모든 상황이 변했다. 우리 가족의 모습은 달라졌고,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모두 건강한 마음으로 한부모의 가족의 형태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릴 적 아이들의 경험이 지금 우리 가족의 형태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
학교에서 혹은 어느 곳에서든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는 평범한 질문 "아빠는 안 오셨어?"라는 질문에 아이가 당황하거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마음을 졸이거나 고민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가족의 형태가 달라지고 난 후 이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생각보다 무겁고 크다. 단순하게 생각했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씩 계속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질문에 넘겼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당당하면 아이들도 자연히 당당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채울 수 없는 자신만의 고민과 상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아이들도 스스로를 더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가족의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배려한다면, 이런 시선의 부담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불행한 부모보다 행복한 한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드라마에서도 그런 말들이 한 번씩 나오면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싸우는 것을 보며 불안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보다 웃으면서 편안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행복한 한부모가 되었어도 세상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세상에 놓인 모든 것이 다르니 그것을 해결하고 행복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또한 오롯이 우리들의 몫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나도 함께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제는 한부모 가정이 더 이상 특이하거나 소외된 가족 형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존중하고,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가족을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가족의 형태와 관계없이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하게 행복하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