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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범위

다양한 가족 형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

by 이원희

세 아이 모두 도합 8년을 한 유치원을 다녔다. 첫애 때는 아빠와 함께하는 캠핑데이, 엄마데이, 조부모데이등 거의 매월 학부모를 초대하는 다양한 모임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양한 가족의 형태의 변화로 인해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참관을 할 수 없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졌고, 그것으로 인한 아이들의 상심이 생기는 일들이 생기자 유치원에서는 모든 가족을 초청하는 행사를 과감히 없애버렸다.


대신 유치원 초청의 날을 만들었다. 하루동안 유치원이 놀이동산으로 변신한다. 아이들이 만든 작품 전시회를 보기도 하고. 선생님들은 각 교실에서 다양한 테마로 수업을 하거나 마술쇼나 연극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수업시간 만든 초청의 날 초대권을 각자 개성에 맞게 만들고, 초대하고 싶은 사람에게 초대권을 직접 준다. 같은 동네 친구랑 가도 좋고, 가족을 초대하거나 어느 누구든 초대해서 함께 즐기면 된다.

미군부대옆이었던 유치원이라 외국인이 많았는데 부모님께 초대장을 준 것이 아니라 유모를 초대해 파티를 즐기는 친구도 있었다. 그 누구도 부모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이상해하거나 속상해하는 친구들 없이,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초청의 날을 즐겼다.


난 그 행사가 참 좋았고,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유치원의 행사 방식이 좋았던 이유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열린 선택권을 준다는 점이었다. 일 년 동안 아이가 만든 작품도 자유롭게 보고, 아이들이 관심 있어하는 다양한 테마들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초대권을 누구에게 줄지는 아이의 선택이었고,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각자 개인의 성향과 상황을 고려한 교육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다양한 교육을 받아야 아이들도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본인이 놓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편견 없이 생각하고 자라날 것이다. 이런 작은 경험들이 모여 아이들의 시야를 넓히고, 세상에 좀 더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다. 한부모 가정은 더 이상 특이한 가족 형태가 아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아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가족을 자랑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막내가 학교에서 가족관계를 작성해야 하는데 아빠를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나한테 와서 물었다.


"아빠는 가족이야?"

어떤 의미의 가족인지.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질문하는지 의중이 파악되지 않아서

선뜻 답변을 하기가 어려웠다.


"아빠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맞지."

"아니, 아빠는 가족이냐고?"

"가족이 뭐라고 생각해?"

"같이 사는 사람? 아니면 한 핏줄?? 아 그럼 가족관계에 아빠. 할머니. 삼촌, 예빈이 언니~ 다 쓰는 건가?"


가끔씩 만나는 아빠가 가족인지, 이혼했으니 가족이 아닌지 아이도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막내의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이 아이의 마음을 덜 아프게 할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불쑥 튀어나온 막내의 말은 날 당황하게 했다.

"아빠는 우리 버리고 갔잖아. 그럼 가족이 아닌 거잖아?"

"에이~ 버리고 갔으면 생일이라고 선물 주고. 만나러 오지도 않았겠지~ 집에 있는 컴퓨터, 피아노 다 너희를 위해서 아빠가 사주셨고, 제주도도 같이 다녀왔잖아~"

"그런가? 엄마랑 아빠랑 이혼했잖아."

"맞지. 화해가 안 돼서 그렇게 됐어. 근데 너희를 사랑하는 아빠인 건 변함이 없지"


생물학적 아빠는 맞으니까.

그걸 또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니 나도 그냥 내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다 싶었다.


"가족은 단순히 피를 나눴다고 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몰라. 한 핏줄로 가족을 나열하라면 삼촌이랑 예빈언니. 예주. 숙모. 엄마랑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까지 다 쓰는 건 맞는 거 같은데, 거기 쓰는 건 같이 사는 걸 의미하는 거 같아. 그럼 가족엔 할머니. 엄마. 오빠들이랑 써야지. 근데 달록이는 가족 아니야?"

"아. 달록이도 김달록이지! 가족이지~"


막내는 그렇게 함께 살고 있는 기준으로 키우고 있는 애완조의 이름까지 적어갔다.


며칠 후 막내는 김달록의 존재로 앵무새를 키우는 부러운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존재보다 애완동물에 더 환호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학교에서는 내가 키우는 애완동물을 소개하는 발표가 또 있었다.

막내는 달록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준비해 발표했다. 개미. 햄스터. 고양이. 강아지 등 여러 종류의 애완동물 이야기가 나왔지만 유일하게 앵무새를 키우고 있는 막내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막내의 가족의 개념은 함께 살고 있는 가족과 한 핏줄인 가족으로 나눠졌다.


막내는 단순히 궁금해서 물은 것 같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어떻게 해야 아이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뒤섞였다. 이혼 이후의 '가족'이라는 정의는 단순한 혈연이나 동거 여부를 넘어서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막내의 질문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큰아이가 자꾸 친구들을 툭툭 치거나 장난을 심하게 건다는 연락이 학교에서 오기 시작했다.

친구를 건드려서 넘어지기도 하고, 장난을 치다가 안경이 떨어져서 얼굴에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고 주의를 줘야 할 것 같다는 선생님의 연락을 처음 받았을 때는 가슴이 털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춘기라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반복되는 것 같고, 나와 성향이 다른 큰 아이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말과 큰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것뿐이었다.


남자아이라서 서열 싸움을 하는 건가? 아니면 마음속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부반장을 할 정도로 친구들과 잘 지낸다고 하는데, 자꾸 친구를 건드리는 문제가 생기는 건 또 왜 그러는 건지 답답했다. 주변에 조언을 구해도 뾰족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한날 우연히 티비를 보다가 "한부모가정에 자란 아이의 마음"이라는 프로를 보게 되었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생활이 변경된 아이들. 그들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은 채 한부모와 살게 되며 달라지는 모든 것들을 아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어릴 적엔 아빠와 엄마와 함께 했었다. 지금은 함께 하고 싶은 본인의 강한 마음이 생겨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이의 마음이 키포인트인데 이것을 우리는 몰라줬다.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며 무의식 속에 편견이나 자격지심이나 불편한 감정으로 쌓아두고 있다가. 다른 친구들이 부모와 함께한 이야기를 들을 때 본인도 모르게 심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보고 큰아이와 조금 더 깊이 이야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대화를 할 때는 주로 문제의 행동에 대해 주의를 주거나 혼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그저 듣고 공감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학교에서 친구랑 장난칠 때, 너는 기분이 어때?"

큰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냥 재밌어서 하는데... 가끔 친구가 기분 나빠하면 내가 잘못한 건가 싶어."라고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서 아이가 느끼는 혼란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몰랐던 아이의 작은 상처들이, 그저 괜찮다고 믿었던 순간들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큰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보지 못했고 다듬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라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다독일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들 유치원시절은 부모, 조부모, 삼촌, 숙보, 사촌들까지 모두 초대해 즐길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지금은 모든 상황이 변했다. 우리 가족의 모습은 달라졌고,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모두 건강한 마음으로 한부모의 가족의 형태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릴 적 아이들의 경험이 지금 우리 가족의 형태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


학교에서 혹은 어느 곳에서든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는 평범한 질문 "아빠는 안 오셨어?"라는 질문에 아이가 당황하거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마음을 졸이거나 고민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가족의 형태가 달라지고 난 후 이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생각보다 무겁고 크다. 단순하게 생각했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씩 계속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질문에 넘겼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당당하면 아이들도 자연히 당당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채울 수 없는 자신만의 고민과 상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아이들도 스스로를 더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가족의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배려한다면, 이런 시선의 부담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불행한 부모보다 행복한 한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드라마에서도 그런 말들이 한 번씩 나오면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싸우는 것을 보며 불안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보다 웃으면서 편안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행복한 한부모가 되었어도 세상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세상에 놓인 모든 것이 다르니 그것을 해결하고 행복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또한 오롯이 우리들의 몫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나도 함께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제는 한부모 가정이 더 이상 특이하거나 소외된 가족 형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존중하고,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가족을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가족의 형태와 관계없이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하게 행복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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