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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가 이끌어주는 그 책을 만나러 가다.

삶은 관찰하는 자의 몫

by 어떤 사서
도서관을 왜 좋아하세요?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안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둣가가 가까운 마을

낮부터 술에 취한 어른이 많았던 곳

모두들 거칠고 힘겨워 보였던 기억


그 안에서 가장 안전함을 느꼈던 곳은

학교와 도서관이었고

가장 좋아했던 공간은 도서관.


오후에 도서관에 숨어있다가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갈 때

그 분위기와 그 길 그리고 그 행복감을

잊지 못할 정도로 좋아했다.


처음 마신 커피도 도서관 자판기 커피였고

스무 살이 넘어서도 첫눈이 오면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것이 설레였던 소녀는


어느새 사서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서공무원이 되기까지 7년


그 사이 나는 수능을 3번 보고

두 군데의 대학을 다녔으며

아르바이트를 수도 없이 했다.


첫 번째 수능과 두 번째 수능은 사실 결과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대학에 모두 떨어졌지만 그렇게

괴롭지가 않았다.


열아홉, 스무 살이었던 나는

그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대학에 모두 떨어지자마자

바로 명동의 옷가게로 친구와 알바를 다니고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힐 정도로

예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만화가 화실 보조, 물고기, 햄스터 판매직,

식당 설거지 알바, 옷가게, 백화점행사..

등등의 일을 했지만 일도 어렵지 않았고 즐거웠지만

한살 한살 나이 먹으며

어느 순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올라왔던 것 같다.

그렇게 보게 된 23살 세번째 수학능력시험.

어쩌면 정신 차리고 처음으로 본시험이었고

나름 자신 있었고 자신 있을만했다.

처음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기에...


그 당시만 해도 언어와 영어 점수만으로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의 국문학과 지원이 가능했었고

수학에 자신 없었던 나에게는 기회였다.


그러나 시험이 다 끝난 후 제일 자신 있었던 언어영역을

중간부터 밀려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꽤나 오래..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 인기에 방영되던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가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도 그때 그랬다.

혼자 불도 안 켜고 어두운 방에서 그저

한탄하고 후회하며 울기만 했다.


그런 여러 밤이 지나고 어느 날 아침에


도서관을 찾았다.

그날 나는 내가 왜 도서관을

이토록 좋아하는지 이토록 숨어들고 싶어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날은 책을 읽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기에

그저 서가 사이를 걷고 또 걷기만 했다.


그러다 만나게 된 책


피터 마스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그 책은 300번대 서가에 있는 책이고

평소의 나 같으면 절대 들춰 보지 않았을 책이다.


나는 지금도 믿고있다.

그날 그 책을 선택한 건 내가 아니고

나와 오래 만난 서가가 나를 그 책으로 이끌어준거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의 내전에 관한 책

그 내전을 역시나 직접적 관계는 없던

다른 나라의 종군 기자가 폭로하듯 썼던 책

내용은 차마 여기 적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고 처절했다.


다른 이의 불행을 보고 나의 불행을 잊었던 거냐?

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랬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보다 그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한없이 작아지는 나와

대비해 너무 크게 느껴지던 세계였다..


좋은 학교를 갈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것,

그것이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것인지,

당장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등이

그 순간만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고민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제까지 내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당장 내 집을 쳐들어와

폭력과 모욕을 서로를 죽이고

해치는 상황들에서

가족이 해체되고 나라가 망가지는 그 상황을

마치 그 이들이 내가 겪은 양 생생하게 읽으며


내가 얼마나 작은 먼지 같은 존재인지..


그래서


그러니까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작은 먼지가 이 넓은 세상

어느 곳을 부유하든 무슨 상관인가?


인생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 책은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관찰자 시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내 세계를 넓히기 위해서

도서관을 가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도서관을 좋아한다.


내가 얼마나 작은 먼지인지를..

나는 아주 작은 먼지이기에

자유롭게 떠다녀도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곳이기 때문에...


그래서 도서관을 좋아해요

서가가 이끌어주는

그 책을 만날수 있으니까!




모든 인간사는, 우주적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요키는커녕 지극히 하찮고 자질구레하기까지 하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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