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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은방울꽃 03화

은방울꽃

은방울꽃을 그리며..

by 페니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웅다웅 피어 군락을 이룬 제철 꽃들을 찾아 나선다. 어렸을 때부터 꽃을 좋아했다. 꽃마다 가지고있는 달콤 쌉쌀한 향기와 선명하고 화려한 색이 내 마음도 환히 비추는 듯했다.

어느날은 SNS를 검색하다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는 꽃말을 가진 꽃을 알았다. 그 후 은방울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 되었다. 마침 색연필로 그리는 보테니컬 아트 수업을 듣던 차였다. 은방울꽃을 그려 집 한쪽 벽을 채우면 그림에서 시작된 행복한 향기가 집안을 채울 것 같았다.

새벽녘 이슬을 머금은 올망졸망 하얀 은방울꽃을 그려보자고 생각한다. 스케치를 끝내고 여러색을 더하여 명암을 표현해본다. 하얀색이라도 그 안에는 빛에 의해 다양한 옅은 색이 발현된다. 짙은 회색, 푸른빛, 꽃술에서 번진 노란색까지 다양하다. 그 많은 색들이 조화를 이루지만 결국은 하얗게 보이도록 그려야만 하니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꽃 사진과 눈싸움을 벌인다. 구석구석 세부사항을 잘 관찰하여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려면 어쩔수 없이 벌어지는 조용한 공방전이다. 당연히 짧은 시간안에 끝낼 수 없다. 하루에 조금씩 시간날때마다 색연필의 색이 종이를 채워나간다. 유명 화가처럼 수백 시간을 투자하여 대작을 그리는 것은 아니라도 나도 나름 뽐낼 수 있는 작품을 완성하리라. 꼼꼼하게 빛에 반사된 그림자, 꽃잎이 그리는 곡선들을 묘사한다.

그리다보면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마음속에 가졌던 복잡한 문제들을 잊고 내가 그리는 대상만 생각한다. 집중하면 할수록 현실에서 벗어나 그림 속 꽃 위로 뛰노는 내가 있다.

나는 어느새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그때엔 화가를 꿈꿀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다. 괴로움을 이기고자 그림에 빠져들면 상도 받을 수 있으니 더욱 더 몰두했다. 기억은 잊는게 아니라 잠시 묻어두는 것이라 하릴없이 내 무의식의 세계에서 두둥실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책장에서 일기 하나를 발견했다. 어른스럽지만 적당히 휘갈겨 쓴 글씨체를 보고 단박에 어머니의 일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다른 사람이 보지못하게 책들 사이에 고이 꽂아두었던 일기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어머니의 비밀을 열어보고 덴겁했다. 호기심이 문제였다.

일기장에는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어머니의 그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버지는 결혼 전 어머니를 많이 사랑했다. 마을에서도 제법 잘살았던 집안에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미인이었다. 군대에서 보낸 편지만 해도 셀 수없이 많고 그 안에 사랑이 절절했다. 그 사랑에 반해 어머니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갓난 아이였던 오빠를 데리고 혈연 하나 없는 창원으로 이사까지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낳은 후 달라졌다. 여러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어디에라도 책망을 돌리고자 했던 마음이었으리라. 일기장에서 나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는 그때의 어머니의 글귀를 읽었을 때 흐르는 눈물은 어쩔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내가 일기를 본 사실을 감추고 평소대로 생활했지만 마음속 슬픔은 거둘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나는 그림으로 빠져들었다. 미술학원에서 몇 시간 동안 그림을 그려도 힘들지 않았다.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받으니 학교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림이 내가 나로 서있을 수 있게 자존감을 꽉잡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도왔다.

은방울꽃의 하얀 꽃잎 위에 움푹 파인 상처가 있다. 바람에 의한 것인지 곤충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림 속에 그 부분까지 고스란히 표현하려 애쓴다. ‘틀림없이 행복해질 것’이지만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쉬이 얻는 행복은 없는 듯하다. 그 상처까지도 지워내지 않고 그대로 그려내리라. 그것도 품어내야 진정한 행복이 피어난다.

어머니 마음 위에 피딱지가 자리잡고 있다. 떼어내려해도 단단히 붙어 흉터만 커질 것이었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했다. 그러다 사람을 미처 보지 못해 사고를 냈고 피해자 유족과 합의를 보지 못해 감옥에 갔다. 딱 한번 어렴풋하게 아버지 면회로 감옥에 간 날이 기억난다. 어릴적 세세한 기억을 잘 못하는데도 이상하게 그날은 생생하다.

유족들은 집까지 찾아와 어머니에게 사람 살려내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죄를 짓지도 않은 어머니가 죄인처럼 용서를 빌었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으로 어머니의 정신은 피폐해져갔다. 정신과를 찾아가기도 했다. 약을 먹으면 잠이 몰려와 순간적인 괴로움은 감춰지더라도 영원히 잊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상처를 영원히 안고가야했다.

그림 속 검은 배경 위에 그림자 진 은방울꽃이 있다. 어둠 속에서지만 행복은 밝고 하얗게 빛난다. 어머니는 한복을 배우시기 시작했다. 고단한 삶으로부터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두 아이를 길러내야만 했다. 일을 하면서 어머니는 조금씩 자신을 되찾았다. 며칠 밤을 새어 피곤해도 일을 할수있음에 감사해했다. 어머니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고 일상에도 조금씩 즐거움들이 생겨났다.

종을 닮은 은방울꽃이 그림 속에서 딸랑딸랑 울리는 듯하다. 쉬이가는 삶을 경계하라는 경종의 의미일까. 그러나 내 귓가에는 그 울림이 즐거움과 행복의 종소리로만 들린다. 지금껏은 ‘틀림없이 행복해지려고’ 행복을 갈구하는 처절한 발버둥을 쳤다. 이제는 은방울꽃의 다른 꽃말 ‘행복이 온다.’가 내 맘 언저리에 맺히는 듯하다. 완성된 그림 속 은방울꽃에서 달콤한 향기가 은은한 행복으로 어머니와 나에게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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