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삼 남매 집안의 차녀
오랜만에 내려간 본가에서 오빠와 언니를 만났다. 나와 터울이 큰 두 사람 덕분에 고모와 이모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 조카 부자가 되었된지 오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애들 교육 이야기에서 영어 파닉스로, 파닉스에서 윤선생 영어 교실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언니가 말했다. "그때 윤선생, 오빠는 컬러로 하고 나는 그거 복사해서 주고 그랬다니까? 웃기지 않냐." 언니는, 그땐 그걸 당연히 그런 건가보다 했다고 덧붙였다. 말 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었노라고. 이제와서야 '웃긴' 이야기라도 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
4대 독자 장남 밑에서 자란 여동생에게 색이 사라졌다면, 5대 독자 막내 위의 작은 누나는 어떨까. 큰 딸, 둘째 딸, 막내아들로 구성된 오빠네는 아들을 간절히 바란 것은 아니나 어쩌다 5대 독자의 명맥을 이어버린 집.
둘째는 올해 일곱 살인데, 몇 년 전에 티셔츠를 사러 갔을 때 핑크색을 사고 싶어 했다고 한다. 분홍색을 너무 좋아하니까, 가게에 있는 여러 색상 중에 그 색을 고른 거다. 그러나 자고로 형제자매 있는 집에선 옷을 물려 입는 법. 부모 된 입장에서는 물려줄 것을 고려해 색상이나 사이즈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고, 오빠와 새언니는 "그래? 근데 분홍색보다 남색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진짜~ 너무 잘 어울린다 이거 남색."이라면서 작전을 펼쳤다고. 아이는 웃으며 알겠다고 남색 사겠다고, 대답했고 남색 티셔츠를 사서 왔단다.
며칠이 지나 제 할머니 집에 갔을 때, 아이가 할머니에게 한 말은. "할머니, 나 사실 남색 옷 사기 진짜 싫었어요. 핑크색 사고 싶었는데 동생 때문에 남색 샀어요."
아. 아이의 진심을 알게 된 오빠와 새언니가 반성했다는 후문. 색깔이 뭐라고, 원하는 거 사주면 또 어떻다고 애한테 상처를 입혔나 싶었단다. 아이는 다 알고 있었다. 정말 잘 어울려서가 아니란 걸. 내가 입을 티를 사는 거였지만 나만을 위한 옷은 아니었다는 걸.
5대 독자 막내 위의 작은 누나의 삶은, 비로소 색은 가질 수 있게 됐지만 원하는 색깔은 가질 수 없는 삶이었다. 엄마 아빠의 속셈을 다 알면서도 애써 웃음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던 아이의 심정이 가늠되지 않았다. 은근한 눈치를 어떤 생각으로 소화했을까. 늦둥이 막내로 살아온 고모로서는 그 심정을 더욱 가늠할 수 없어, 고모를 좋아하는 마음을 곁눈질로 표현하는 쑥스럼 많은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부둥켜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언제까지 그날의 일을 기억할까. 우리 언니, 제 큰 고모처럼 자기 자식을 낳고 기를 때까지 기억하게 될까. 그날이 오면... 그날에는, 많은 것이 변해있을까? 변했다는 자각이 없을 만큼의 변화를 기대해도 좋을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