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하기보다 움직이기
나태 지옥에 빠져있다. 겨울잠도 아니고 왜 박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움지여지질 않아. 조카한테 뺏은 극사세 담요 때문인가.... 나가더라도 가던 곳만을 반복했다. 익숙한 길, 익숙한 골목, 익숙한 가게, 심지어는 점심 저녁 메뉴도 익숙하게 처리하게 됐다. 카페는 두말할 것도 없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늦장을 부리고, 익숙한 점심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할 일이 뒤통수를 때리듯이 생각났다. 나갈 채비를 하며 어디로 나갈까 생각했다. 왠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졌다. 가까운 곳인 데다가 나중에 가보려고 마킹까지 해둔 곳이지만, 어쩐지 미루고 미룬 한 카페에 가기로 결정!
그 카페로 가는 길은 알고 있는 길인데도 알지 못한 길이었다. 주민센터가 있는 길이어서 잘 알고 있는 거리였지만, 한동안 그 길을 걸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가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만 걷고 발길을 돌린 곳이었기 때문이다. 찾아가고 있는 새로운 카페는 '어느 정도'를 넘어서는 위치에 있었고, 나갈 때까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걷다 보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몰랐던 가게들이 너무 많았다. 먼저 upsm 없음이라는 와인바. 빵과 치즈 같은 안주와 와인을 파는 곳. 두 번째는 우미담이라는 식당. 곰탕을 파는 곳. 원래 그 자리에 다른 식당이 있었던 것 같고, 바뀐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시향. 그 자리에 중식당이 있다는 건 한참 전에도 알았지만, 이름을 뜯어보고 외관을 뜯어보고 창으로 보이는 내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부에 사인이 그렇게 많이 붙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 검색해보니 "탕수육 최고 존엄"이라는 리뷰가 있었다.
가깝고도 낯선 풍경을 보며 집으로 걷다가, 역시 익숙한 점심을 먹으며 보던 <귀멸의 칼날>의 장면이 생각났다. "몇백 년을 살았어도 이런 곳에 틀어박혀 있으면 세상 물정을 모른다 해도 어쩔 수 없으려나?" 한 곳에 틀어박혀 밤에만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혈귀가 된 이 기분은 뭐지.
아무리 잘났어도, 한 곳에만 머무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 터다. 마치 대단한 힘을 가졌어도, 경험 데이터는 고작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귀멸의 칼날> 속 혈귀들처럼. 내 실력을 능가하는 존재는 없다고 믿으며, 내가 아는 것이 최고라 믿으며, 엉덩이 무겁게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혈귀들과 익숙한 게 좋은 거라 믿으며 옴짝달싹하지 않은 나는 뭐가 달랐을까.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자꾸만 가둬지는, 일종의 필터가 작용하는 세상이 되었다. 맞춤형 추천이 나를 맞춰주고, 웹 쿠키가 나를 따라다니는 세상. 일관된 취향과 일관된 생활을 만족스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세상. 세상이 만드는 필터에 '다양함'을 만드는 건 결국 움직이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거였다. 새로움을 마주치려는 나의 의지와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나의 움직임 말이다.
뜻밖의 일들을 가끔은 일부러 만나고 잘 소화 해내는 경험이 필요하다. 세상 물정이 늘 최신 업데이트되는 삶이라면, 예고 없이 찾아와 시스템을 공격하는 바이러스를 그런 게 있었냐는 듯이 막아내고 의연하게 구동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외연을 넓히는 건 아마 이런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