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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entMeditator Dec 14. 2024

리뷰 '봄날은 간다'

사랑이 스쳐간 자리, 봄날은 간다


시간이라는 건 참 묘하죠.
똑같이 흐르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마다 다르게 스며들고 각자의 마음에 전혀 다른 흔적을 남기잖아요.
봄날은 간다를 다시 본 어느 날 저는 그 시간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었어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같은 장면과 같은 대사를 마주하고 있었거든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제게 조금 낯선 이야기였습니다.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갔는데 화면 속 두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어긋나 있었거든요.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왜 그렇게 다르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왜 끝내 멀어져야만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상우의 대사는 제게 너무 차갑게 느껴졌고 사랑이란 원래 변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속으로 반문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 다시 이 영화를 보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어요.
이번에는 두 사람의 대사 하나하나 표정과 행동이 왜 그렇게 이어졌는지 가슴 깊이 이해되더라고요.
어쩌면 영화는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제 시선이 많이 변한 거겠죠.





유지태가 이영애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참 아름다웠어요.
소리를 녹음하며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끌리고 조용한 순간마다 상대를 의식하는 모습들이 너무나 섬세하게 그려져 있더라고요.
특히 둘이 함께 소리를 들으며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에서는 마치 사랑이 시작되는 찰나의 설렘을 눈앞에서 느끼는 것 같았어요.
말없이 주고받는 눈빛에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데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잊어버리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항상 같은 온도로 머무는 건 아니잖아요.
두 사람도 그랬어요.
사랑을 시작했을 땐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거죠.
유지태는 사랑을 붙잡으려 애쓰는데 이영애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어요.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어긋난 공기가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결국 상우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죠.
그때는 그녀가 마냥 이기적으로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그녀의 진심이 이해되더라고요.
사랑은 변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꼭 누구의 잘못이라거나 비난받을 일은 아니잖아요.
그저 마음이 달라지는 순간들이 모여 관계를 바꿔놓은 것뿐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영화를 다시 보면서 자연스럽게 허진호 감독이 만든 또 다른 작품인 팔월의 크리스마스가 떠올랐어요.
같은 감독이 만든 작품이지만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 다르죠.
팔월의 크리스마스는 다가올 이별을 알고 있는 사랑의 따뜻함을 이야기하잖아요.
한석규와 심은하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 순간만으로도 완전하고 소중한 감정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다가가고 그 찰나의 순간들을 행복으로 채우는 모습이 얼마나 따뜻하고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요.





반면 봄날은 간다는 사랑이 변화하고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그려내요.
둘의 관계는 설레는 시작을 맞이했지만 결국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게 되었잖아요.
이 영화는 그런 사랑의 변화도 삶의 일부라는 걸 조용히 보여주는 작품 같았어요.





사랑이 끝났다는 건 슬픈 일이죠.
하지만 그 사랑이 무의미한 건 아니라는 걸 봄날은 간다는 보여줘요.
유지태가 결국 혼자가 되어 길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쓸쓸하면서도 어딘가 희망적이었거든요.
사랑이 떠났지만 그 시간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배웠고 그 경험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으니까요.





사랑은 그렇게 사람을 바꿔놓기도 하고 삶의 방향을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끝난 사랑이든 지나간 관계든 그것들이 남긴 흔적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봄날은 간다는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영화 같아요.
처음엔 그저 쓸쓸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이야기가 지금은 얼마나 솔직하고 진실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거든요.
허진호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랑이란 꼭 아름답고 영원해야만 의미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사랑이 변하고 끝나는 순간마저도 삶의 한 부분이고 그 흔적이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준다는 걸 담담하게 보여주더라고요.





지나간 사랑이 전부 끝난 게 아니라 우리 안에 무언가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가르쳐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봄날은 간다는 단순한 사랑 영화가 아니라 시간과 관계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이야기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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