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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와 함께 하는 산티아고의 숨은 보물 찾기

[2일차/칠레] 산티아고 누가 재미없대? 도시 구석구석 재미 찾는 재미

by 도나윤

건축가와 함께 하는 산티아고 시내투어



공사판에서 시작된 시내투어


산티아고 출신 건축가 D는 나와 미국인 여행자를 사방이 공사판인 시끄러운 대로변으로 인도했다. D는 이제 시내투어를 시작하겠다며 자기소개를 하더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첫 번째 투어 장소라고 했다. 도대체 무엇을 구경해야 할지 대략 난감한 풍경에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엇을 구경해야 할지 대략 난감한 상황

그가 그런 정신없는 장소에서 시내투어를 시작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산티아고의 지리적 중심지인 바께다노 광장(Plaza Baquedano),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 광장(Plaza Italia)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각종 축하, 시위, 모임 등의 행사가 개최되어 사회·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한 이곳은 D가 생각하는 산티아고의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산티아고의 주요 도로와 지하철 노선 지나는 교차로이며, 공사판이었던 이유도 지하철 추가 개통 공사가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광장, 중심지가 맞았다. (출처: 좌 WSJ, 우 santiagochile.com)


이 건물이 무엇을 닮았는지 맞춰보시오


그는 제법 건축가다운 면모로 그 공사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특이하게 생긴 건물을 가리키며 퀴즈를 냈다.

'이 건물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나요?'

참고로 나는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그가 퀴즈를 내기 전까지 나는 그 건물의 특이한 생김새는 물론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저게 뭐람...?'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 공격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답 근처에도 가지 못한 두 여행자는 그가 공개한 정답을 듣고 시에 동그랗게 커진 눈을 마주치며 '아하!'를 외쳤다. 다시 보니 그 건물은 영락없는 90년대 핸드폰 모양이었다. 심지어 건물 이름도 전화탑(Torre Telefónica), 통신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 대단한 발견으로 나는 큰 영감을 받았다.


'세상에, 어떻게 건물에 이렇게 생긴 옷을 입힐 생각을 했지? 하마터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뻔했잖아!'

이 독창적인 디자인을 알아봐 주지 못했다니... 훌륭한 건축가와 그의 창조물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던 찰나,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D에게도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읊어주며 다 네 덕이라고 감사를 전했으면 좋았으련만, 영어가 짧아 럴 수가 없었다.

D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공사판에 지나지 않았다.
D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90s mobile phone이 되었다.




혼자 왔으면 절대 몰랐을 건물의 사연



머리 없는 150세 건물의 기구한 사연


D는 햇살이 아름다운 작은 공원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위험한 도시라는 소문 때문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마음이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공원에 들어서자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털릴까 봐 사진도 거의 못 찍고 있던 나는 D에게 부탁하여 야쟈수 나무 뒤로 숨겨진 빨간 건물을 배경 삼아 드디어 첫 사진도 찍었다.

평화로운 산티아고의 아침

D는 그 빨간 건물이 바로 우리의 두 번째 투어 장소인 '성 프란시스코 데 보르하 교회(Iglesia San Francisco de Borja)'라고 했다. 무려 1876년에 지어진 이 역사 깊은 교회에는 기구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D의 설명을 듣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교회의 첨탑이 뿌리째 뽑혀 있는 것이 아닌가!

성 프란시스코 데 보르하 교회(Iglesia San Francisco de Borja)

첨탑이 무너져버린 사연은 이러했다. 2019년 칠레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듬해 1주년 기념 시위에서 시위대가 교회 두 군데를 불태웠단다. 그중 하나가 칠레의 국가 경찰인 카라비네로스(Carabineros)가 주로 찾던 이 교회였다고. 실제로 이 교회 맞은편에는 직무 수행 중 순직한 국가 경찰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었다. 더욱 기구한 것은, 이 교회가 불에 탄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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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맞은편 국가 경찰 기념비와 화재 현장 (출처: 우 Dailymail)

D는 칠레 시위 당시의 나비효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2019년 대규모 시위는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 인상에서 촉발되어 30년간 쌓인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 폭발로 이어졌다고 한다.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 문제'라는 구호와 함께 잦은 공공요금 인상에 대한 항의가 군부독재시절 민영화된 교육, 의료, 연금 등에 대한 개혁으로, 더 나아가 독재의 잔재로 남아있는 헌법 개정 요구로까지 이어졌다. 이 여파로 사상 초유 APEC 정상회담 취소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혼자 왔더라면 사진만 찍고 돌아섰을 텐데(물론 이 작은 공원에 들어올 일조차 없었겠지만). 그럼 이 건물의 정체도, 그것의 안타까운 사연도, 그 뒤에 숨겨진 칠레인들의 사정도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다.



속이 새까맣게 타버린 건물의 사연


D는 우리에게 시위대가 불을 지른 또 다른 교회를 보여주었다. 이곳은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교회였는데 2019년에 화재가 발생해 비교적 최근인 2024년에 다시 개방되었다. 아름다운 외관을 보건대 완벽하게 복원이 된 것 같았다.

라스타리아 위치한 베라크루즈 교회(Iglesia de la Veracruz)

그렇게 별생각 없이 들어간 교회의 내부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일부 공간만 복원이 되었고, 벽과 천장은 불에 새까맣게 그을린 채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D에 따르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자 상징으로서 화재의 흔적을 일부 남겨두었다고 한다. D에게 물었다.

"칠레에서는 화가 나면 종종 불을 지르는 모양이야...?"

알고 보니 시위대가 불을 지른 교회는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 속이 새까맣게 타버린 교회도 안타깝고, 변화를 요구하다 분노가 폭발해버린 칠레 사람들의 상황도 안타깝고. 도대체 칠레 사람들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던 걸까?


칠레는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미친 물가'로 유명하다. 실제로 내가 체감하기에도 서울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게 느껴지기도 했다. 2019년 대규모 시위 이후 현재까지 칠레의 지하철 요금은 약 1,216원(800페소, 러시아워 기준)으로 서울(1,500원, 현금 기준) 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칠레의 한달 최저임금은? 2025년 1월 1일자 기준 약 78만원(510,500페소)으로 우리나라(약 210만원)의 1/3 수준이다. 놀랍게도 이는 2019년(301,000페소) 대규모 시위 이후 약 1.7배 인상된 금액이다. 화날만 했네... 그래도 건강한 분노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불에 탄 건물이 다시 살아가는 법



문화예술공간으로 부활한 GAM


D는 한창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철골 구조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어느 널찍한 건물로 우리를 데려갔다. 공교롭게도 이 또한 오래전 불에 탄 슬픈 사연을 지닌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본래 컨벤션 센터, 군부독재 시절 국방부 청사 등으로 다양하게 쓰이다가, 불이 난 이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부활하여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다소 흉물스러운 외관

다소 흉물스러웠던 외관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현대적인 건축 디자인을 자랑하는 산티아고의 문화예술공간 GAM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건물 유리를 거울삼아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연극, 댄스, 음악, 시각예술 등 다양한 전시, 공연 등이 열리는 공간으로, 프랑스 파리의 복합문화공간 퐁피두 센터를 떠올리게 했다.

현대적인 내부 디자인


GAM에 숨겨진 이야기들


GAM은 Gabriela Mistral Cultural Centre의 줄임말인데, 1945년 중남미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여성작가이자, 시인, 외교관인 Gabriela Mistral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산티아고 곳곳에 붙어 있던 흑백사진 속 여성들이 모두 동일 인물이었음을... 실제로 한국에서는 그녀의 시집이 2023년에서야 처음 번역됐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화재 전후 모습과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출처: gam.cl, Wikipedia)

산티아고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그라피티를 발견할 수 있는데, GAM 입구에도 카메라 화각에 한 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에서 커다란 기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는데, 그 피해자로 어부, 칠레 원주민, 학생, 구리 광부를 묘사하면서 자원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메세지를 표현하고 있다. 시간만 더 있었으면 산티아고 거리 곳곳의 그라피티도 맘껏 구경하고 돌아갈 텐데, 산티아고에 너무 짧게 머무르는 것이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이 벽화를 그린 BRP(Brigada Ramona Parra)는 사회·정치적 메세지를 전하는 칠레 공산당의 벽화 예술 집단이라고 한다.




라스타리아? 힙스타리아!



산티아고의 힙한 거리 TOP 2


미국인 여행자의 카페인 수혈 요청으로 우리는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리는 D가 생각하는 산티아고에서 가장 힙한 거리 두 군데 중 하나인 라스타리아(Lastarria)로 향했다. 나머지 하나는 벨라비스타(Bellavista)라고 했다. 두 군데 모두 가보고 싶었지만 레이오버로 몇 시간 마실 나온 나에게는 그냥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산티아고에서 1박을 하고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탈 걸 그랬나?'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라스타리아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치명적인 고양이가 우릴 반겼다. 이어서 예사롭지 않은 예수님이 등장했다.


심상치 않은 감성이 풍겼다. 이 구역을 샅샅이 훑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투어가 끝나면 혼자 재빠르게 다시 돌아와 힙스테리아를 활보하고 공항으로 돌아가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전혀 몰랐던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이런 재미, 그래서 나는 준비되지 않은 여행이 좋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렇지만 꼭 집에서부터 알아갈 필요는 없잖아? 도착해서 알아가면 되지!

시간만 있었으면... (1)
시간만 있었으면... (2)

산티아고 여행은 '뭐야, 그런 사연이 있었단 말이야?', '아니, 이런 곳이 숨어 있었단 말이야?' 하면서 재미를 발굴해 나가는 재미가 있다. 너무 유명해서 어디 가서 뭘 봐야할지 미리 꿰뚫고 앞선 여행자들을 뒤따라가는 여행과는 다르다. 마치 미개척 대륙을 탐험하는 기분이랄까?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도시 곳곳에 숨겨진 의외성과 반전에 훅훅 꽂혀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 묘한 매력이 있다.


쉬는 시간, 카페인 + 영감 충전


D가 추천한 카페에 갔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야외 테이블에 잠시 앉아 쉬었다. 여유롭게 눌러앉고 싶은 곳이었지만 갈 길이 바쁜 우리는 커피를 손에 들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아이스커피만 있었으면 더 완벽했을 텐데
결론 : 나는 결국 힙스타리아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가는 길에 우리는 미뤄 둔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던졌다. 요즘 중남미에서 가장 힙한 나라는 '우루과이'인데 (흥미로운 사실!), 한국인들은 아시아에서 자신들이 가장 힙하다고 생각하는지? 한국에서 K팝과 K드라마의 지위는? 오징어게임2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은? 아마도 그들에게 내 대답은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K어쩌구'에는 무관심한 지 오래인 데다가, 우리 중 오징어게임2를 보지 않은 자도 내가 유일했다. 우리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동안 정작 한국인인 나는 우리 것에 너무 소홀했었던 것 같다. 칠레에 대해서라면 척척박사인 D랑 같이 다니다 보니 나의 무관심이 부끄러워졌다.

칠레 가톨릭 대학

D는 쉬는 시간을 틈타 잡담을 나누며 걸어가는 와중에도 잠깐 걸음을 멈춰 눈앞에 보이는 칠레 가톨릭 대학의 건축 디자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직업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나 보였다. D는 산티아고가 너무 좋다고 했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도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D를 통해 영감을 충전했다. 새로운 곳을 찾아 바깥으로만 떠돌 것이 아니라, D처럼 내 나라, 내 도시에도 관심을 좀 쏟아봐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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