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칠레] 공항 대기 10시간, 레이오버로 칠레 산티아고 맛보기
게으른 자의 최후, 공항 대기 10시간
아침 7시 20분,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미국 애틀란타를 경유하여 꼬박 하루 비행기를 타고 마침내 남미 땅을 밟았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남아 있었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최종 목적지인 산페드로 아타카마까지 가려면 국내선 비행기를 2시간 타고 칼라마라는 도시로 이동한 후, 다시 차를 타고 1시간이나 더 들어가야 했다. 험난한 여정에 앞서 나는 하루 전에 비행기 표를 산 게으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국에서 칠레까지 오는 비행기표는 운 좋게 남아있었는데, 산티아고에서 칼라마까지 곧바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는 거의 매진된 상태였다. 남아있는 가장 빠른 표는 오후 5시 출발 비행기. 남미에서의 첫 일정이 10시간 공항 대기라니, 안 그래도 짧은 여행에 하루를 통으로 날리는 꼴이었다.
사실 거의 매 시간 한 대씩 있는 비행 편이라 돈을 몇 배 더 내면 두세 시간 정도는 일찍 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저녁 무렵에나 도착할 운명이니 아타카마를 구경하기에는 이미 글러먹은 상황이었다. 이 사단을 초래한 과거의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부들부들하던 중, 나를 부르는 산티아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참에 중남미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한번 둘러볼 생각은 없니?'
평생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은 머나먼 도시를 살짝 맛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귀가 솔깃해졌다. 갑자기 이 안타까운 상황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흥미진진한 모험의 일부처럼 느껴지면서 설레기 시작했다. 오후 5시 비행기를 타야만 하는 아주 좋은 이유가 생겼다. 심지어 10시간의 대기 시간마저 짧게 느껴져서 더 늦은 비행기를 타야 하나 고민까지 되었다. 비행기가 매진되지 않았더라면 경유지를 여행지로 만들어 볼 생각은 절대 못 했을 것이다.
'역시! 미리 예약 안 하길 잘했어!'
산티아고는 단 한 번도 나의 여행 후보지에 오른 적 없는 아주 낯선 도시였다. 산티아고에 뭐가 있는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었던 나는 반나절 여행 코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행 후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악명 높은 치안 문제 때문에 벌벌 떨며 여행을 강행하여 무사히 돌아온 후기 또는 범죄의 희생양이 된 후기. 사실 나는 치안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중남미 잘 사는 나라의 수도인데 어련히 안전하겠거니, 혼자 자유롭게 시내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상상을 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산티아고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치안이 급격이 악화되어서 핸드폰 소매치기는 애교 수준이고, 한낮에 도심 한가운데서 총기 강도를 당했다거나 마트에서 장보다 다 털렸다거나 하는 등의 무시무시한 경험담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외교부에서도 칠레 방문 시 강도와 소매치기에 유의하라며, 여행자들의 휴식처 스타벅스를 범죄 빈발 장소로 꼽고 있었다. 카메라와 핸드폰 노출에 주의하라니 그럼 사진은 어떻게 찍는단 말인가! 심지어 몇몇 장소는 '예방책이 없으니 방문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기까지 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산티아고에서 내가 강도를 당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여행 초반부터 빈털터리가 될지도 모를 리스크를 떠안고 산티아고 시내를 구경할 것인가? 아니면 안전을 위해 공항에서 10시간을 낭비할 것인가? 고심 끝에 나는 위험애호가로서의 본성을 따르기로 했다. 다만, 묘안이 떠올랐다. 산티아고의 악당들로부터 나를 구해줄 수 있는 동행을 구해 같이 다닌다면, 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날 급히 구한 동행에게 메세지를 보내 접선 장소의 정확한 주소를 입수하였다. 약속시간은 오전 10시 30분, 약 3시간의 시간 동안 입국 수속부터 이동까지 해야 하니 시간이 아주 빠듯했다. 수하물을 찾자마자 다급히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 산티아고는 한여름 날씨였다. 가장 먼저 입고 있던 겨울 니트와 기모 바지부터 벗어던지고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24시간 비행으로 무너진 화장을 새로 하다시피 수정하고, 죄다 엉켜버린 머리 또한 거의 감다시피 물을 적셔 감쪽같이 정리했다.
그리고 산티아고 공항 짐 보관소를 찾아갔다. 그곳에 캐리어와 함께 노트북, 카메라, 현금, 카드 등 중요한 짐들을 모두 맡겼다. 산티아고 마실을 위해 3시간전 면세샵에서 급구한 소매치기 방지용 지퍼 달린 크로스백을 개시하고, 사진 찍으려고 챙겨 온 세컨폰, 소액의 현금, 그리고 털려도 되는 잡동사니들을 챙겨 넣었다. 유사시 악당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목숨만은 챙겨 올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혹시 가방을 통째로 잃게 되어도 공항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옷 속에 교묘하게 현금까지 끼워 넣으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마도 산티아고에서 공항 다음으로 안전한 곳은 우버 택시가 아닐까? 산티아고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나의 산티아고행 소식을 접한 남미 출신 친구의 조언에 따라 나는 전구간 우버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가뜩이나 동양인을 보기 드문 남미에서 괜히 대중교통 이용한답시고 혼자 돌아다니다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보다, 몇 푼을 더 주더라도 우버를 타는 것이 치안 문제를 원천 차단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단, 별점이 중요한 우버 기사님들이 갑자기 강도로 돌변해서 나를 위협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는 우버 기사님과 함께 한 40여분의 시간 동안 지나치게 편안함을 느낀 나머지 그가 흡사 나만의 보디가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덕분에 무섭기만 했던 산티아고의 첫인상은 의외로 따뜻하기만 했다. 게다가, 차 안에서 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산티아고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반짝거리는 햇살을 받아 도시가 초록초록 빛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강력범죄라니! 역시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인가.
우버를 잡아 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남미에 도착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영어가 단 한 마디도 안 통한다는 남미로구나!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미리 스페인어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영 아쉬웠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대화를 시도하고 싶었던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한국말로 택시 안의 적막을 깼다.
"산티아고에 정말 그렇게 소매치기가 많나요?"
산티아고 치안의 실상이 궁금했던 나는 번역기에게 질문을 던졌다. 똑똑한 번역기가 나를 대신해 택시 기사에게 스페인어로 소매치기의 현실을 물어봐주었다. 그는 질문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곧바로 하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Si, si, 어쩌구저쩌구..."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그렇다는 뜻의 Si 뿐이었다. 번역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택시기사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다시 말해달라는 나의 바디랭귀지를 용케 알아들은 그가 스페인어로 다시 한번 천천히 말해주었다. 현지인들도 소매치기를 당한다는 그의 이야기가 이상하게도 나를 안심시켰다.
번역기 대화법을 몇 번 연습하다 보니 꽤나 자연스럽게 한국어-스페인어 대화가 가능해졌다. 세상이 정말 좋아졌구나! 나는 신이 나서 택시 기사에게 소매치기 예방 팁을 전수해 달라고 했다. 번역기가 교과서를 쏙 빼닮은 그의 말을 읊어 주었다.
"핸드폰을 꺼내지 마세요."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지만 그의 친절함과 조금 더 길었던 발화시간을 보건대, 아마도 번역기가 무언가를 빠뜨리고 전달했으리라. 나는 스페인어로 격한 감사를 표시했다.
"그라시아스! 그라시아스!"
기사님도 번역기 대화법에 익숙해졌는지 언젠가부터 스페인어로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새 그는 말을 꺼냈다가도 내가 번역기를 들이밀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스킬까지 습득했다. 회전 교차로를 돌면서 번역기가 말했다.
"이곳은 센트럴 시장입니다. 소매치기가 많습니다."
그는 보디가드도 모자라 어느새 나의 가이드 역할까지 자처하고 있었다. 이렇게 따뜻할 수가! 그의 따뜻함 덕분에 산티아고의 무시무시한 소문을 듣고 얼어붙은 나의 마음이 조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40분가량을 달려 어느 공사판 옆 인적이 드문 거리에 차를 세웠다.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장소였다. 심지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누군가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주소를 다시 보여주면서 여기가 맞냐고 재차 물었다. 그는 목적지가 맞다고 했다.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왔을 리 없다... 나는 그를 믿고 왠지 으슥해 보이는 이상한 골목에 내렸다.
바짝 긴장한 채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동행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오지 않았다. 출발할 때만 해도 분명히 메세지를 주고받았었는데, 갑자기 내 연락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산티아고를 설명하던 아찔한 단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매치기... 총기강도... 강력범죄...'
이내 오만가지 위험한 상상들이 무서운 속도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납치는 아니겠지? 아니, 우버 기사랑 한 패인 거 아니야???'
마침내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약속시간을 고작 10분 넘겼을 쯤이었다. 산티아고의 흉흉한 소문 때문에 겁을 잔뜩 먹은 나머지 10분이 100분처럼 느껴지는 마법을 경험했다. 그는 내가 급하게 구한 산티아고 현지인 동행이었는데, 알고 보니 한 블럭 떨어진 큰 길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보니, 나 말고 혼자 온 다른 외국인 동행이 한 명 더 있었다. 아마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나의 연락을 늦게 확인한 것 같았다.
산티아고에게는 미안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남미 여행자들에게 산티아고란 여행지보다는 경유지이다. 산티아고의 처지가 그렇다 보니, 나 같은 여행자 동행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요즘 치안이 안 좋기로 소문난 도시를 혼자 돌아다닐 수는 없는 법. 꿩 대신 닭이라고 나는 산티아고 현지인 동행 구하기를 시도했다. 요즘은 Airbnb, Get your guide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도시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는 현지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산티아고에도 몇몇 현지인들이 시내투어 모객을 하고 있었다. 그중 오전에 투어를 시작하는 두 명에게 나의 레이오버 일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메세지를 보냈다.
'Hello! 제가 당장 내일모레 아침 7시쯤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할 예정인데, 시내투어를 하고 과연 오후 5시 비행기를 무사히 탈 수 있을까요?'
그중 한 명이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다. 하나를 물었는데 열을 알려주던 그의 결론은 투어 끝나고 밥을 먹고 가도 될 정도로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친절함에 홀라당 넘어가 곧바로 예약을 걸었다. 산티아고의 악당들을 마주쳐도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것 같은 든든함이 메세지에서부터 묻어났다. 무엇보다 그가 내 또래의 건축가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산티아고가 아무리 노잼 도시로 유명하다고 해도,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도시 이야기라면 재미없기도 힘들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나는 현지인 건축가와 나처럼 혼자 투어를 신청한 미국인 여행자까지 총 두 명의 건실한 청년들 사이에 껴서 마음 놓고 산티아고 시내를 둘러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