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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모방의 도시 산티아고의 짬뽕 같은 매력

[2일차/칠레] 산티아고에는 런던, 파리, 뉴욕, 그리고 서울이 있다.

by 도나윤

유럽 향기 폴폴 풍기는 도서관 투어



하루종일 공부하고 싶어지는 열람실


커피타임을 마치고 D가 투어를 다시 시작한 곳은 칠레 국립도서관이었다. 나름 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도서관이라지만, 시내투어에서 도서관을 데리고 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이라 의아했다. 그는 이곳에서 공부하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우리를 곧장 열람실로 안내했다.

'그렇게 데려갈 곳이 없나...'

아무 기대 없이 문을 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의외의 광경에 두 여행객은 동시에 '우와!'를 외쳤다.


루종일 공부하고 싶어지는 따뜻한 채광이 비추는 아름다운 열람실었다. 공부하는 이들은 어디선가 출몰한 광객들이 꽤나 익숙한 듯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는 우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신들의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D는 우리의 반응이 아주 흡족한 듯 말했다.

"여기가 산티아고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야"



파리에서 본 듯한 풍경


이어서 D는 우리를 위층 자료실로 데려갔다.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유럽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벽이며 천장이며 모든 것이 남미여행의 감성이 아니었다. 도서관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어느 미술관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납득이 가는 건물이었다.


D는 이 도서관의 하이라이트라며 자신 있게 자료실의 문을 열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고풍스러운 공간, 묘한 기시감이 드는 이곳, 파리의 도서관을 쏙 빼닮아 있었다! 복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진하게 풍기는 유럽의 향기, 마치 순간이동의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한 남미가 아니야...!'

도서관 투어의 화룡점정은 도서관 1층에 위치한 사랑스러운 카페였다. 투어가 끝나면 반드시 이곳에 다시 돌아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글을 쓰리라 다짐했다. 언젠가 산티아고에 다시 간다면, 나는 가장 먼저 이 도서관을 재방문할 것이다.

결론 : 이 도서관 카페에도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유럽부터 미국까지, 당당한 모방의 도시 산티아고



산티아고에서 런던 찾기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산티아고 시내에는 대놓고 런던과 파리를 따라한 거리가 있다. 이름까지 당당하게 런던 거리(Calle Londres), 파리 거리(Calle Paris)다. 우리는 먼저 런던 거리 초입에 있는 눈물 나는 사연을 가진 건물, 산 프란시스코 교회(Iglesia de San Francisco) 앞에 멈췄다


지진에서 살아남은 산티아고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

이 교회는 16세기에 지어져 산티아고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유일하게 남아있는 식민지 시대 건축 양식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강도 7 이상의 지진을 15회 이상 견디며 현재까지 홀로 살아남은 건축물인데 종탑은 강진에 무너져내려 19세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런던 거리

산 프란시스코 교회에서 몇 걸음만 걸어라면 런던 거리가 나온다. 사실 그 직관적인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런던을 떠올리지 못했을지도 모겠다. 이 거리는 무려 1923년에 만들어졌고, 나는 2010년대에 런던여행을 했으니 그럴 수 있다.


이곳의 빈티지한 유럽풍 건물에는 카페, 레스토랑, 호텔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시간만 있었으면 테라스 카페에 앉아 이 작은 유럽을 여유롭게 즐겼을 텐데 산티아고에서의 짧은 4~5시간 일정이 너무 아쉬웠다.

'내가 기대를 너무 안 했나? 생각보다 볼 게 많잖아?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이번에는 비행기표가 매진되어 어쩔 수 없이 잠깐 산티아고를 들르게 되었지만 다음에 다시 남미에 오게 된다면 최소 1박 일정으로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다. 물론, 치안이 좋아진다는 전제 하에...


론드레스 38

런던 거리에는 칠레의 어두운 과거를 엿볼 수 있는 다크 투어리즘 포인트가 있다. 바로 38번 건물, 론드레스 38(Londres 38)이다. 칠레에서는 1973년 피노체트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7년간 군사 독재를 이어간 역사가 있다. 이때 세계 최초 선거를 통해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이었던 아옌데 정부가 무너졌다. 군부 정권은 반정부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여 사망자, 피해자 등이 4만 명에 이르는데, 몇 년 전 국가 차원에서 당시 실종자 천여 명에 대한 조사와 유해 수색을 재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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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드레스 38은 본래 칠레 사회당의 지역 본부였는데, 군사 쿠데타 이후 칠레 국가정보국(DINA)의 통제 아래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을 구금하고 고문하는 장소로 변모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30세 이하의 젊은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당시 잔혹하게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장소로 개방되었고, 건물 앞 자갈길에는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 있다.

KakaoTalk_20250303_122115870.jpg 22세, 23세에 희생된 누군가를 기리는 자갈길


산티아고에서 파리 찾기


파리 거리

런던 거리와 파리 거리는 X로 교차하고 있어서 런던 거리를 조금만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파리 거리에 닿게 된다. 아마도 D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런던 거리에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파리라고 생각하면 파리처럼 보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곳과 오버랩되는 파리의 장소들이 몇 군데 떠올랐다. 프랭땅 백화점의 구름다리와 몽마르뜨 언덕의 울긋불긋한 건물들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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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증권가

오히려 파리 거리를 벗어나, D가 산티아고의 월스트리스트라고 소개한 증권가(Barrio La Bolsa)에서 더욱 파리스러운 건축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랑스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두 건물은 왼쪽이 산티아고 은행, 오른쪽이 산티아고 증권거래소(Bolsa de Comercio de Santiago) 건물이다. 여기야말로 마치 파리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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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뉴욕 찾기


산티아고의 당당한 모방 정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건물의 사잇길로 들어가면 뉴욕 거리가 펼쳐진다. (실제로 길 이름이 Nueva York, 뉴욕이다.) 그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제법 뉴욕스러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뉴욕 플랫아이언 빌딩의 통통한 버전(?) 같은 건물이 떡하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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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런던, 파리, 뉴욕 여행을 마치고 다시 칠레로 넘어갈 시간. 건축물 스타일이 확 달라지는 순간이동의 경계 지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오른쪽은 화려하고 미학적인 디자인의 건물들이, 왼쪽에는 깔끔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의 건물들이 줄지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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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서울 찾기


산티아고에 비록 '서울 거리'는 없지만 나는 서울도 봤다. 산티아고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그란 토레 산티아고(Gran Torre Santiago)는 서울에서 홀로 우뚝 솟아있는 롯데타워랑 판박이다. 산티아고 도심 뒤에 병풍처럼 서있는 안데스 산맥도 서울의 빌딩숲 뒤로 펼쳐진 수많은 산을 닮았다. 심지어 쇼핑 거리도 스페인어 간판만 빼면 조금 한적한 우리나라 번화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참고로 나는 못 가봤지만, 여행 중에 만난 동행이 말하길, 산티아고 한인타운이 되게 크고 한식당도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시간이 많다면 잠시 들러 한식을 충전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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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 토레(출처: Wikipedia)와 어느 쇼핑 거리


산티아고는 여행자들에게 딱히 볼 게 없어서 공항 갈 겸 잠시 쉬어가는 곳, 뚜렷한 색깔 없는 '그냥 도시' 정도로 인식된다. D가 말하길 산티아고는 모방 천지라고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산티아고에서 런던, 파리, 뉴욕을 보았다. (어쩌다 보니 서울까지...) 온갖 도시들의 느낌이 짬뽕된 오묘한 색깔 그 자체가 산티아고만의 개성인 것 같다.




시내 한복판의 대통령궁



지상엔 대통령 집무실


우리는 마지막 투어 장소인 모네다궁(Palacio de La Moneda)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본래 돈을 찍는 조폐국으로 지어져 화폐를 의미하는 '모네다'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현재는 칠레 대통령의 집무실로 쓰인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만큼 관광객도 많고 경비원도 많았다. 대통령궁 맞은편에는 정부 청사 건물이 몰려 있다. 모네다궁에 대해 설명하던 D가 갑자기 대통령이 지나간다며 도로 위의 어떤 차량을 가리켰다. 대통령의 출퇴근 현장을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닌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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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유명해진 배경에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맞서던 아옌데 전 대통령이 끝까지 저항하다 국민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후 집권한 피노체트는 가혹하게 인권을 탄압한 독재자로 비난받고 있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칠레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가 갈린다. 칠레와 우리나라는 꽤나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실제로 피노체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고 싶어 했다고 한다.

KakaoTalk_20250303_145157363.jpg 이 동상 주인공이 아옌데 전 대통령인 줄 알았는데 다른 분이었다...


지하엔 문화센터


대통령궁 지하에는 각종 전시, 식당, 카페 등이 있는 라모네다 문화센터(Centro Cultural La Moneda)가 있다. 문화센터 곳곳에 테이블이 놓여있는데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각자 노트북을 보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과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 이렇게나 가까이 붙어있다니. D는 건축가답게 지하인데도 채광이 훤히 들어오는 건축 디자인의 훌륭함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시내투어를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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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와 함께 한 시내투어 덕분에 나는 달랑 3시간 만에 산티아고 구석구석을 알차게 둘러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위험천만하다는 도시를 감히 혼자 돌아다녀 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혼자 다시 가서 찬찬히 둘러보고 싶은 곳도, 아르마스 광장(대표적인 관광지인데 외교부에서 방문 자제를 권고한 곳 중 하나라 매우 망설여졌다. 그래서 D가 데려가지 않았던 것일까?) 등 투어 중에 못 들러서 따로 구경하고 싶은 관광지도 많았다. 이대로는 아쉬워서 도저히 공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당연히 조심 또 조심해야겠지만... 결국 다 사람 사는 곳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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