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귀찮아 죽겠지만 남미여행은 가고 싶어
“그래서 결국 남미 가기로 한 거야?”
“아...아마도요...”
꽤 오래전부터 설 연휴를 끼고 2주 정도 남미여행을 갈 수도 있다고 회사에 밑밥을 깔아 놓고는, 연휴 직전까지도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을 미룬 남미여행을 이제는 해치워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과 이것저것 알아볼 것 태산인 여행 준비 과정의 귀찮음,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내적 갈등은 정점을 찍고 있었다. 사실, 더 이상 여행 준비랄 것도 없었다. 갈 거면 당장 주말에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하루 이틀, 짐이라도 싸면 다행인 시간이었다. 짐 쌀 걱정을 하다 보니, 불현듯 지난 여행에서 터져버린 캐리어가 생각났다. 일단 여행을 가게 될지도 모르니, 출근길에 쿠팡 로켓배송으로 급히 캐리어부터 주문했다. 배송시간 하루를 생각하면 오히려 가장 급한 건 비행기표가 아니라 캐리어였다.
연휴 직전 마지막 출근일인 금요일, 회사에는 일단 밑밥 깔아 둔 휴가를 높은 확률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말씀드렸다. “근데 아직 비행기를 안 사서... 연휴 끝나고 제가 여기 앉아있을 수도 있어요! 하하.” 여전히 사족을 떼지 못한 채로... 직장인 여행의 정석은 금요일 퇴근 후 밤 비행기를 타는 것이지만, 이미 글러먹은 상황이었다. 2주 남미여행을 위해 정석대로라면 6 영업일의 휴가를 쓰면 될 일이었지만,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죄로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출발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총 8 영업일의 '아마도 휴가' 계획을 회사에 공유했다. 그리고 만약 여행을 간다면 미리 끝내야 하는 업무들을 모두 처리하느라 아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연휴를 앞두고 모두가 칼퇴한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지키며 남은 업무들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이번에 꼭 남미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와 다음번으로 미뤄도 되는 핑계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여행이 이런 식이었다. 여행 날짜가 코앞에 닥쳐야만 비로소 행선지가 정해지는 피곤한 레파토리의 반복. 미리 여행을 계획하려고 하면 온갖 변수들이 떠올라서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때 가서 여행 가기 싫어지면?’
‘그때 가서 더 짧거나 길게 가고 싶으면??'
‘그때 가서 다른 여행지에 꽂혀버리면???’
실제로 떠나는 시점에 마음이 이끄는 대로 여행을 가려면, 그 어떤 것도 미리 확정 지을 수 없었다. 나에게 여행다운 여행은 오로지 즉흥여행뿐이었다. 이러한 즉흥성이 극단적으로 변질된 것은 바야흐로 십여 년 전 출발 3일 전에 비행기표를 끊고 떠난 미국여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행을 가긴 갈 건데 어디로 갈지 갈팡질팡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이 출발 3일 전. 비록 몇 달 전에 비행기표를 미리 사는 것보다야 비싸긴 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그 추가 비용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렇게 갑자기 정해진 여행지에서 특별한 계획도 없이 너무 재밌게 놀아버린 나머지, 그 즉흥성이 비정상적인 형태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뭐야, 3일 전에 비행기표 사니까 더 재밌잖아..?’
"나 내일 대만 가"
"너는 무슨 옆집 놀러 가니?"
사실 이미 오래전에 가족들은 숏 노티스를 날리고 며칠 뒤 홀연히 사라지는 '우리 집 길동이' 버릇 고치기를 포기했다. 하루 전에 비행기표를 끊고 떠나는 여행도 처음은 아니다. 처음 신기록을 갈아치운 것은 몇 년 전 혼자 떠난 대만여행이었는데, 심지어 미루고 미루다 타이페이 공항에 도착해서야 첫날 숙소를 검색하기 시작했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면서도, 그 와중에 은근히 변태처럼 그 아슬아슬한 스릴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근데... 숙소 없이 오니까 더 재밌잖아..?' 실제로 계획이 백지장이었던 덕분에 나는 우연한 만남의 연속이 이끄는 흥미로운 여행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학창 시절 미쳐 있었던 대만드라마 '장난스런키스' 테마여행을 온 여행자를 우연히 만나 덕질의 추억을 나누고, 어쩌다 마주친 현지인들과 타이페이 클럽도 탐방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이 극단적인 즉흥여행을 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친구들과 쿠바여행을 계획하다가 코로나가 터졌는데, 차일피일 비행기표 발권을 미루고 있던 나만 빼고 모두 미리 예약한 비행기표 값을 몽땅 날리고 만 것이다. 매일 가격 올랐다고 빨리 티켓팅하라는 잔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어쩐지 본성을 거슬러 미리 사고 싶지 않더라니... 그동안 남들보다 조금씩 비싸게 샀던 비행기표 값을 이렇게 한방에 보상받을 줄이야! 역시 사람은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비행기 티켓팅을 그만 둘 이유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나에게 남미여행은 기한 없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매년 새해 계획에 꾸준히 등장하여 당당히 한 줄을 차지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줄 그어진 적 없는 몇 년 묵은 숙원사업들 중 하나. 남미는 아직 내가 발도장을 찍지 못한 유일한 대륙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는 우유니 소금 사막부터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공중도시 마추픽추까지 언젠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것들이 모두 그곳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즉흥 여행자에게 남미 대륙은 옆집 가듯 놀러 가기엔 너무나도 머나먼 여행지였다. 게다가, 워낙 변수가 많아 철저한 계획이 필요한 데다가 치안, 고산병 등 신경 쓸 것도 많은 난이도 높은 여행지로 알려져 있다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게 언젠가 준비가 되면 떠나리라 미뤄 둔 채 몇 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몇몇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여행준비만 해도 설렌다고. 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나에게 여행준비란 생각만 해도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어차피 지켜지지 못할 계획을 세우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여행 전의 설렘을 모르니 어찌 보면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남미여행을 한 번쯤 꿈꿔 본 사람이라면 막상 떠나려고 하면 막막한 그 심정에 공감할 것이다. ‘언젠가 한 번 가 봐야지’ 그 이상의 적극적인 마음이 쉽사리 생기지 않는다. 특히 연차 1주일 붙이기도 눈치 보이는 직장인들에게는 더욱이나 엄두가 나지 않는 여행지다. 가뜩이나 휴가도 짧은데, 편도 24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 12시간 정반대인 시차로 인해 왕복 2~3일을 그냥 까먹어버리기 때문이다. 국가 간 이동도 빡세지, 각종 투어 종류도 복잡하지, 우유니는 가려면 비자도 받아야 하지, 미리 챙길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거기다 영어도 안 통한다고 하니 '내년엔 꼭 스페인어 공부하고 남미여행 가야지!'를 몇 년째 다짐했지만 결국 책 한 장 펼쳐보지 못했다. 결국 남미여행 너마저... 이렇게 무계획으로 떠날 운명이었구나...
떠나기 전날까지도 계속 망설였다. 현실적으로 돌아오는 추석 연휴나, 아예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맞았다. 마음이 편하려면 그래야 했다. 이번에 여행 준비 하나도 못했는데(특히 마추픽추는 미리 피켓팅도 해야 된다던데...), 아직 스페인어 공부 시작도 못했는데, 일기 예보도 온통 비 투성이던데, 지금이면 안 되는 수많은 이유들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게 10년, 20년, 30년이 더 주어진다 해도, 남들처럼 몇 달 전에 미리 여행을 준비하고 떠날 가능성은 0이라는 것을. 날 가로막는 단 하나의 이유는 오로지 '귀찮음', 그거 하나뿐이었다. 귀찮음 세포가 여행을 미루라고 속삭였다. 온통 비, 비, 비로 도배되어 있는 일기 예보를 상기시키면서 나를 자꾸 유혹했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추석연휴에 가면 딱이야. 건기라서 비도 안 오지롱!' 하지만 바닥에 물이 찰랑거리는 우유니 거울을 보려면 모든 리스크를 떠안고 우기에 떠나야만 했다. 지금, 당장!
'네가 언제부터 여행준비를 했다고?' 충동질 세포가 콧방귀를 뀌며 반드시 지금 가야 하는 이유들로 나를 설득했다. 가장 중요한 건 달 예보였다. 우유니 사막의 쏟아지는 별을 보기에 완벽한 초승달 주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회사에도 진작 밑밥을 깔아 둬서 휴가 쓰기 부담이 크지 않은 상황이었다. 설 연휴에 보너스로 임시공휴일까지 총 4 영업일의 휴일이 생겼으며, 마침 연휴 직전에 큰 프로젝트를 하나를 마무리하였다. 그렇다 해도 2주 휴가는 상당히 드물어 눈치가 보였지만, 갑자기 내가 파리에 잠깐 살면서 배워 온 바캉스 문화를 용기 내어 조직에 전파하는 것이 마치 나의 소명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도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대학원 방학에, 취미로 준비해 온 공연들도 설 직전에 줄줄이 올리고 비로소 몇 달 만에 찾아온 휴지기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반드시 뽕을 뽑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일 가는데 아직도 비행기표를 안 샀다고?"
진짜 여행 가는 거 맞냐, 너는 이미 글렀다며 주변에서 나보다 내 여행을 더 걱정해 주지만, 나는 언제나 태평하게 그들을 안심시킨다.
누군가 비행기표 매진을 걱정한다면?
“괜찮아, 이 가격 주고 지금 비행기표 살 사람 나밖에 없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걱정한다면?
"그럼 거기 안 가면 되지!"
어차피 내가 가게 될 여행이라면 당일에도 비행기 표가 남아있을 거라고 믿으면 아주 편해진다!
토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남미로 떠나자. 귀찮아도 무조건 가야 한다. 지금 당장! 마음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 비행기표를 검색했다. 여전히 나의 자리가 남아있었다. 심지어 원한다면 당장 당일 밤에도 출발할 수 있었다. 나는 짐을 하나도 싸지 못한 탓에 다음 날인 일요일 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단, 적당한 가격대에 남아있는 비행 편은 단 하나, 칠레 산티아고 in 페루 리마 out 뿐이었다. 한국인 여행자들이 주로 택하는 반시계 방향 루트와 정 반대로 여행을 해야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남들과 반대로 돌면 초승달이 차오르기 전에 우유니 사막을 먼저 찍을 수 있어 오히려 잘 된 셈이었다. 게다가 비행시간도 미국 환승시간을 포함해 총 24시간으로 최단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역시 이번에 남미에 갈 운명이었다고 정신승리를 마친 후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나 내일 남미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