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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출산도 내 맘대로 허락하지 않는 그녀

첫 아이 출산 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by graceforme

난 임신하고도 그녀 때문에 편하지 않았다.

다시는 임신하고 싶지 않아!라고 다짐 할 만큼 싫었다. 육아에서도 나르시시스트인 그녀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고 자기 말이 다 옳았다.





결혼 후 7개월쯤 지나 임신을 하게 되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처음 겪는 경험이라 무섭기도 했다. 난 직장인이라 회사를 다녀야 했는데 임신 2개월이 지나면서는 입덧이 심하게 와서 힘들었다. 한식은 전혀 먹지도 못하고 김치 냄새도 못 맡고 물도 맛이 이상해서 먹지 못했다. 회사에서 점심도 먹기 힘들었고 너무 심하게 토한 날에는 얼굴에 반점이 확 올라와 산부인과에도 가게 되었다. 서울 가는 직행 버스를 타고 내리는 순간 구토를 하거나 울렁거렸다. 매번 집 앞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면 구토를 했다. 참 힘들었었다.

그녀에게 힘들다고 전화로 종알종알 얘기하니 어느 날 아들로부터 다 하는 입덧을 힘들다고 자꾸 얘기한다며 한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만삭이 되어 출퇴근도 더 힘들어졌다. 그래도 출산 후부터 길게 쉬고 싶어 끝까지 다녔다. 내가 만삭으로 언제 아이가 나올지 모르는 주말에도 매주마다 아들은 가야 했다. 그녀는 아들을 토요일에 오라 해서 일요일에 보내줬다. 나 혼자 만삭의 몸으로 주말을 보내야 했다. 내가 안 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


혼자서 장을 본다며 카트를 끌고 집 앞 마트를 걸어갔을 때 갑자기 시야가 안보이면서 깜깜해지기도 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안보였다. 그때도 신랑은 시댁이었다.

전화로 눈이 안보였다고 얘기하니 "진작 얘기하지 그랬으면 갔지"....라고 말했지만 말한다고 당장 올 것도 아니니 의미 없었다.


이제 예정일에 가까워졌을 무렵 주말에 병원을 가야 하는데 신랑이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밥과 반찬을 해놓고 친정엄마와 만삭의 몸으로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거리의 병원까지 가게 되었다. 신랑은 전날도 무슨 일인지 그녀와 전화로 한참을 통화했는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 좋은 말을 들은 것 같았고 분명히 또 내 이야기일 것 같았다.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고 신랑이 아프다고 해서 그다음 날 나만 병원에 가게 된 것이었다.


친정엄마와 병원을 갔다가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녀가 나한테 전화했다. 또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 아들 아프다던데 꼭 병원을 가야 하니? 좀 미루면 돼지 ! "

다짜고짜 뭐가 또 열이 받았는지 꼬투리를 잡는다. 아니 다음 주면 예정일인데 병원을 같이 가도 모자랄 판에 아들 아픈 데 갔다고 난리를 친다.


"아프다고 해서 친정 엄마하고 왔는데요."

"너네 엄마도 같이 있어? "

" 네 옆에 있는데요"


맨날 너네 엄마 너네 엄마!!! 교양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녀다.


처음으로 그녀한테 당당하게 대들었던 거 같다. 지하철에서 전화로.....

이후로는 아이 낳을 때까지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 낳고 연락하기로...





예정일이 일주일이나 지나 버렸다. 다시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내가 양수가 터진 거 같다고 하니 의사가 갸우뚱하며 검사해 보더니 진짜 양수가 터졌다고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입원을 해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신랑이 양가에 전화해서 입원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어영부영 다시 연락하게 되고 통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분 다 아이 낳을 때까지는 오시지는 말라고 했다.


어쩌다 보니 입원실이 수술방 옆방이 되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밤새 10분마다 응애응애 애기 태어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우리는 아이를 낳을 때 신랑이 함께 있으면서 탯줄을 자르기로 했었는데 나보다 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신랑이 같이 못 들어갈 것 같다고 했다. 피에 대한 공포증이 있다고 했다.


그다음 날 아침부터 태동검사를 하며 간호사가 들락날락하면서 계속 내진을 했다. 오후 3시쯤 무통 주사를 놔주었다. 진통이 조금씩 오고 있었는데 무통을 맞고 1시간 정도 괜찮았다. 하지만 오히려 갑자기 진진통이 왔다. 너무너무 아프고 온 팔에 힘이 쏠려 침대를 부여잡게 되었다.

하지만 내진을 하면 아직 아이 머리가 안 내려왔다고 했다. 너무 아프고 힘든데 좀 기다려 보고 안 내려오면 아마도 제왕절개를 해야 할거 같다고 간호사가 얘기해 주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버티고 6시쯤 새로운 간호사가 들어왔다. 내진을 해보고 다 열려 있으니 조금 있으면 아이가 나올 거라고 했다. 간호사마다 다른 말을 하니 도움이 안 되었다.


조금 있다 처음 보는 의사가 와서 내진을 했다. 10개월을 보던 의사는 오늘이 주말이라 없다고 다른 의사가 들어온 것이다.


"제왕절개 하셔야 합니다. 아이가 아직 안 내려오기도 했고 골반이 비뚫어져서 위험합니다. "


아니 그전 의사는 골반 보고는 멀쩡하다고 했는데 갑자기 골반이 비뚫어져서 안된다니......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진통은 진통대로 다 겪고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전부터 그녀가 제왕절개하는걸 별로 안 좋아했다.

" 남자들은 제왕절개 하면 싫어해. 난 40킬로에도 4.5킬로 낳았어. 원래 병원에서는 다 제왕절개 하라 그런다. 웬만하면 제왕절개 안 해야 돼. "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신랑이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수술해야 한다고..... 그전에 그녀가 해왔던 말들이 있어 말 안 하고 수술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게 실수였다. 전화하지 말았어야 했다. 난 의사가 보고 간 후에도 극에 달한 진통을 하며 7시가 다 되도록 버텼다. 내진을 수없이 했다. 하지만 아이 머리가 안 잡힌다고 했다.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시골에서 산파도 해봤다는 그녀.... 그녀는 며느리에게도 산파가 되어 옆에 있는 아들에게 지시했다.


" 아직 나올 때 안 됐는데.... 진통 한지 얼마 안 됐잖아. 아들 여기 다리 좀 잡아봐."


난 누워서 다리를 구부리고 있었고 신랑이 발목을 잡았다. 5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기 시작하면서 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골반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손목은 침대 난간을 너무 부여잡아서 너덜너덜했다. 난 고통 속에 소리치는데 그녀는 태연하게 아들보고 다리 잡으라며 아직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아까 내진한 의사가 다시 나타났다.


"수술하셔야 해요. 안 그러면 아이도 위험해요."


그녀가 얘기했다.


" 아니 아직 때가 안된 거 같은데 , 저는 40킬로에도 4.5킬로를 낳았는데 진통한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의사는 나가면서 빨리 결정하셔야 한다고 했다. 난 벌써 2시간 가까이를 더 버티고 있었다. 이제는 수술 동의서를 써야 했다. 그녀가 나타나면서 버티고만 있었는데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기다리던 신랑도 더 이상은 안된다며 수술해야 할거 같다며 동의서를 쓰러 나갔다.


그녀는 혼자 중얼중얼 거리며 문 앞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못마땅한 것이다. 난 아파서 소리치고 있는데 그녀는 제왕절개 하는 게 싫어서 팔짱만 끼고 앉아 있었다. 난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신랑이 동의서에 서명하러 나간 사이...

난 스스로 혼자 일어나야 했다. 붙잡아 주지도 않고 문 앞에 앉아 있는 그녀였다. 난 일어나면서 침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침대 시트가 모두 붉은색이었다. 베개보다 넓게 진하게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진을 너무 많이 해서 피로 물들어 버린 것이다.


붉은색 침대에서 난 혼자 내려와서 팔짱 끼고 앉아 있는 그녀 앞으로 지나갔다. 부축도 없이.....

난 그때의 그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날 응시하는 것도 아닌 앞을 쳐다보며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그 얼굴....


혼자 그렇게 수술실로 갔다. 수술실에서도 진통이 와서 빨리 해달라고 하고는 기억이 없다. 기절하고

얼마 후 아이 울음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내 아이가 맞는지 얼떨떨하기도 하고 너무 아프다가 기절해서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수술을 하고 4 박 5 일을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그녀가 매일 왔다. 난 수술로 앉아있기도 힘든데 그녀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를 간호사가 데리고 왔다. 아기를 직접 보는 시간이 있었고 그때 친정식구들도 모였다. 다 같이 아기를 보며 신기해했다. 양가의 첫 아이니까.


그때 그녀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라는 것이다. 오빠도 있는데 물리라는 것이다.


"오빤데 뭐 어때 "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기도 싫었다.



출산 전부터 출산 후까지 난 그녀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었다.

퇴원 때에도 그녀가 함께 했다. 아이는 그녀가 안았다. 그렇게 조리원에 도착해서야 그녀는 돌아섰다.


조리원에서 신생아의 몸을 살피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 혹시 난산이었어요? 아이 이마에 멍이 들어있어요. "


자세히는 몰랐는데 아이는 멍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멍이 들 정도로 힘들었던 출산인 것이다. 계속 수술을 미뤘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것 같다.


그 이후 난 아이 낳는 순간이 끔찍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출산의 고통이 아닌 그녀의 눈빛이 계속 생각이 나서였다. 친정 엄마였다면 그렇게 팔짱 끼고 보고만 있었을까 싶어서.....


그때는 다시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의 육아에도 그녀는 모든 걸 간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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