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시 Oct 06. 2024

얼굴이 잘 빨개져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사회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K직장인의 애환

“어머, 홍시 님, 얼굴 빨개지셨어요!”


안다, 안다, 이미 알고 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어 알려주지 않아도 얼굴이 빨개진 거 정도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얼굴에 훅 끼치는 열감과 미세하게 부푼 듯한 피부 감각까지.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 정도면 어느 정도로 빨개졌는지까지 가늠할 수 있다. 


나는 살면서 나처럼 얼굴이 잘 빨개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당황스러울 때, 누군가는 부끄러울 때 얼굴이 빨개진다고 하지만 나는 대중이 없었다. 분명 곤란하지도, 수줍지도 않은데 별거 아닌 대화를 하다가 훅 얼굴이 빨개지고는 했고, 오히려 빨개진 얼굴(또는 얼굴에 대한 지적) 때문에 도리어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시답잖은 잡담을 나눌 때도, 간단하고 짧은 대화를 나눌 때도 얼굴이 여지없이 빨개지는 버릇 때문에 나는 사람과 대화할 때마다 노심초사했다. 얼굴이 빨개질까 봐 두려워 사람과의 대화를 극도로 피했다.


하지만 얼굴이 잘 빨개져도 먹고는 살아야 했다. 학생 때까지는 스스로 아싸를 자처하며 낯선 사람, 불편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잘도 피해 다니며 살았지만 대학교 졸업장을 받는 날 깨달았다. 


더 이상은 도망갈 곳이 없다…! 


이제는 싫은 걸 어느 정도 안 할 수 있는 학생에서 벗어나 싫은 것도 꾸역꾸역 해내야 하는 K직장인의 삶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사람구실은 모름지기 밥벌이부터 시작하기 마련. 하지만 취업의 문턱은 너무나도 높았다. 스펙 짱짱한 다른 지원자들을 제치고 합격 목걸이를 쥐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내겐 더 어려운 관문이 있었으니,


‘과연 면접 볼 때 얼굴이 안 빨개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취업에 성공한다고 해도 회사를 다니면서 얼굴이 안 빨개질 수 있을까? 나는 얼굴만 빨개지는 게 아니라, 얼굴이 빨개지면서 옷이 젖을 정도로 진땀이 나고 손이 벌벌 떨리는 증상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모습이 이상한데 다른 사람, 특히 회사에서는 더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이런 나를 고용해 줄 회사가 있을까? 이런저런 핑계와 함께 두려움에 떨며 차일피일 취업을 미루던 나는 더 이상 취업을 미루기 힘든 나이가 되고 나서야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흩날려라 이력서 권법을 시전 했다. 취업을 하긴 했으니 나름의 효과는 있었다고 봐야겠다.


면접 때도 얼굴이 빨개지고 땀을 삐질삐질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면접이라 긴장했다는 평가가 들어간 것인지 어떻게 취업이 되긴 됐다. 뽑아놓고 나니 평상시에도 삐질삐질 덜덜 대며 다니는 애가 들어와서 회사는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겠지만 나 또한 팀장 없는 팀에 신입으로 들어가게 될 줄 몰랐으므로 서로 퉁치기로 하자. 어쨌든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평생 사람 구실도 못 하고 사는 거 아닌가 걱정하던 내게 밥벌이라는 동아줄을 내려준 회사에게 감사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했고, 운이 좋게도 열심히 한 만큼 성과가 잘 따라줬다. 어딜 가도 일에 한해서는 기본 이상은 한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하지만 회사는 내 일만 하면서 다닐 수는 없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모인 만큼 적정 수준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스킬은 장착하고 있어야 내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협업 상황에 놓일 때마다 나는 패닉에 가까운 불안에 빠졌다. 미팅 일정이 잡히면 며칠 전부터 틈날 때마다 미팅 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A부터 Z까지 상상했는데, 정작 미팅에 들어가서는 백지화 상태가 돼서 내가 예상한 상황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홍조와 땀으로 버무려진 얼굴로 회의실에 앉아 있곤 했다. 꽤나 바보 같은 모습이었을 텐데 나를 무시하지 않고 내 얼굴이 빨개진 것도 모른 척해줬던 약 8할의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2할의 사람들도 뭐… 이해가 되기도 하고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연차가 쌓이면서 익숙한 동료와 업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낯선 사람 혹은 내가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여지없이 얼굴이 빨개지고 옷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는다. 업무적인 대화보다 스몰토크를 하는 게 100배는 더 어렵다. 


나는 왜 이렇게 사회성이 없을까?


얼굴이 잘 빨개져서 사회적 상황을 회피하다 보니 사회성이 없어진 건지, 사회성이 없어서 얼굴이 잘 빨개지기 시작한 건지 인과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원만하지 않은 대인관계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어떤 대단하고 복잡한 사건에 얽혀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점심시간에 동료와 날씨 얘기를 하다가 얼굴이 빨개질까 봐, 이번 주에 나는 솔로 봤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괜히 말 걸었다가 얼굴이 빨개질까 봐 하고 싶은 말을 아껴야 했다. 고작 스몰토크 몇 마디 나누는 데도 얼굴이 빨개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이 바보 같고 외면하고 싶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보여줄 이야기는 사회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얼굴이 잘 빨개지는 K직장인의 애환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회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나처럼 얼굴이 잘 빨개지고, 사회적인 상황을 극도로 피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