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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다은은 Nov 15. 2024

[소설] 티시포네 프로젝트 18화

18화. 폭력은 합리화되고


몇 차례 이어진 오프라인 모임 덕분인지 티시포네 회원들은 꽤 친숙한 관계가 되었다. 오늘도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건배가 몇 차례 오갔다. 확실히 초창기 때 보였던 어색하거나 쭈뼛함은 완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서로는 오래전 친구나 지인이었던 것처럼 상당한 친화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도 확인하면서 형이네, 동생이네, 신분증이라도 까보자며 시시덕거리더니, 얘기는 어느새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다가 곡절은 얼마 전 아이의 문제로 신경이 곤두섰던 일화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중간에 회원들은 그의 얘기를 끊으며 자기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려고 시도했지만, 곡절은 아집인지 패기인지 밀리지 않은 채 끝까지 이어갔다.




곡절은 퇴근 후 곧장 집으로 왔다. 현관에 들어서니 여느 날처럼 아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반기는 기색이 예전보다는 많이 떨어졌지만, 오늘은 왠지 더 이상했다. 조금은 머뭇거리는 모양새가 심하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들리도록 아내가 말문을 열었다.

“슬기 담임선생님한테서 전화 왔었어.” 학기 초도 아닌데 별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기가 친구를 심하게 때렸다는 거야.” 아내의 평상시 말투에 짧은 표현이었지만, 이걸 곡절이 듣기에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들렸다.


“심하게? 얼마나 심했길래…?” 적잖이 놀랐지만, 그래봐야 애들인데 그냥 조용히 타이르면 될 일이 아니었던가, 전화까지 했다는 게 의아스러웠다. 톤을 바꾸면서 다시 물었다.

“아니, 왜 때렸다는 건데?” 거실로 나오며 아내와 눈빛이 마주쳤다.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

“그 아이가 삼겹살이라고 놀렸다는데….” 한편으론 우스웠지만, 반면 속이 부글거렸다.

“그래? 그 녀석 맞을만한 짓 했네.” 남편의 말에 아내는 조금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건방지게 사람 생김새를 가지고 조롱 질이야!” 아내의 표정을 해석하기가 난해했지만, 곡절은 생각나는 대로 소리를 약간 높이며 말했다.

“나도 그런 얘길 했지만, 담임은 그렇다고 친구를 때린 게 잘한 행동은 아니라면서 엄청나게 훈계하더라고.”라면서 아내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곡절은 아내의 푸념을 듣고 나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담임선생이 자기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독기가 저절로 내쏘아지면서 목소리가 까칠해졌다.


“어이가 없네. 그럼 그런 얘기를 하는데 바보 멍청이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으라는 거야 뭐야!”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아내에게 괜스레 역정을 내는 꼴로 보여 순간 머쓱해졌다.

“대화하라는 거예요, 대화를. 그래야 친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거라고….”

“여보, 웃긴다고 생각 안 해. 그 자식부터 대화할 자세가 없는 거잖아. 친구를 그따위로 부르는 게 먼저 잘못한 거지. 그걸 지적하는 게 순서잖아. 생각할수록 분통 터지네.” 아내는 자기가 뭔가를 잘못해서 충고받는다고 느끼는지 기분이 뾰로통해졌다.


“담임은 애들한테 그런 얘기는 충분히 해줬다면서, 무엇보다도 폭행이 더 큰 문제라는 견해더라고.” 아내가 할 말은 다 해봤다는 걸 입증하면서 다음 상황으로 몰아가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결론은?” 곡절은 더 얘기해 봐야 얻을 게 없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뭐겠어, 슬기 교육 잘하라는 거지.” 아내의 답을 듣는 순간, 곡절은 정말 어처구니없다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내 자식 내가 알아서 키우는 거지. 요즘 선생이 예전처럼 위신도 없거니와 우리랑 교육 차이도 크질 않잖아.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나, 어디서 훈계질이야.” 생각할수록 괘씸했지만 여기 이 방에서 분노를 터뜨린들 아내에게 타박하는 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엉킨 목이라도 푸는 것처럼 침을 삼키면서 평소의 목소리로 전환했다.


“슬기는 학원에서 언제 오지?”

“수업 하나 빠지고 일찍 오라고, 9시에는 들어올 거예요.”

그는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흔들어 시간을 먼저, 그리고 혈압을 확인해 보았다. 순간 긴장했지만, 정상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씻고 나오자, 허기가 몰려왔다.

“배고프네, 밥 먹자.”



곡절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은 분노로 뒤틀려 있었다. 그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소한 싸움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담임선생이 그 문제를 심각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곡절은 아내에게 분노를 드러내는 대신, 애써 평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래도 여보, 요즘은 다들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잖아. 슬기 친구 부모한테도 괜히 우리가 나쁜 부모로 비칠까 걱정돼. 학교에서도 아이들 사이의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지 않게끔 지도해야 하고….” 아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곡절은 아내의 말을 곱씹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 불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학폭이 득세하는 현실이라는 게, 가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었다.


“요즘 애들 참 편하게 컸어. 그냥 자기들끼리 싸우고 말 일이었잖아. 우린 어릴 때 누가 싸웠다 해도 부모한테까지 가고 그랬나?” 곡절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짓더니 말을 보태었다. “진짜, 세상 사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애들도 배워야 한다니까.”

그의 말을 듣는 아내의 표정이 뭔가 할말이 더 있어 보였다. 그녀는 곡절이 좀처럼 냉정해지지 못하자 오히려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러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보, 아이가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도 좋지만, 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다툼 없이 해결하는 법도 배우면 좋잖아요. 슬기한테도 그런 걸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아내의 말에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허기가 밀려오는 걸 숨기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오늘따라 왠지 밥맛이 썩 좋지는 않아.”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계를 보았다. “9시면 슬기도 들어오니까, 우리 밥부터 먹자고. 애 오면 다시 얘기해도 늦지 않잖아.” 아내는 그제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곡절은 아내의 표정에 무거운 마음이 스며드는 걸 보며 잠시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애써 그런 감정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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