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흘러 이별인걸 알았어
힘없이 돌아서던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만큼 너도 슬프다는 걸 알아
하지만 견뎌야 해 추억이 아름답도록
그 짧았던 만남도 슬픈 우리의 사랑도
이젠 눈물로 지워야 할 상처뿐인데
내 맘 깊은 곳엔 언제나 너를 남겨 둘 거야
슬픈 사랑은 너 하나로 내겐 충분하니까~
김건모의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노래가사다. 가사를 보면 이별은 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기리며 이별한 슬픔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혼’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썼으니 위 가사처럼 내 맘 깊은 곳에 전남편을 남겨 뒀냐고? 아니 아니. 천만의 말씀!
'아름다운 이별'이 없듯
'아름다운 이혼'도 없다.
진흙탕 진흙탕 하는데 진흙탕까지도 같이 구르기 싫어서 원. 만. 한. 합. 의!
외도의 증거를 제대로 잡았는데도 소송하지 않고 ‘조용히 가시옵소서’ 전략으로 나는 이혼을 했다.
물론 이혼의 정점에서는 외도로 시작한 것이 폭력이 되고 경찰이 출동하고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 본 공황장애로 인한 호흡곤란에 몇 번을 응급실에 가야 했을 만큼 최악을 겪었지만 내가 ‘아름다운 이혼’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혼을 안 해주는 일명 ‘버티기 권법’을 쓸까 봐 나는 이름이 좀 뽀대 나는(?) 전략을 좀 썼다.
'승병선승 이후구전 패병선전 이후구승(勝兵先勝而後求戰 敗兵先戰而後求勝) 말부터 참 멋지다. ‘이기는 군대는 이겨놓고 전쟁에 임하지만 지는 군대는 전쟁을 먼저 시작한 후 승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뭐 거창하게 문자를 좀 썼지만 이혼을 하기 위해 속에서 끓어오르는 모든 것들을 꾹꾹 참고 혼인증명서에 이혼의 단어가 박힐 때까지 사알~살 달랬다는 뜻이다.
하나의 전략을 더 썼다.
‘욕금고종(欲擒故縱), 큰 이득을 위해 작은 것을 과감하게 내어 준다는 뜻'으로 이혼을 위해 모든 걸 유책배우자님에게 내어주려는 마음으로 욕심도 다 내려놓았다.
이혼을 신청하고 6살 딸, 이제 돌을 갓 넘긴 아들이 있어 3개월의 숙려기간을 버텨야 했다. 같이 오래 줄 서기도 끔찍해서 오픈런한다는데 집이 팔리지 않아서 3개월을 함께 끔찍하게 버텨야 했다. 이혼을 하려니 가장 큰 문제는 두 가지였다. '있지도 않은 재산'과 '아이들 양육문제'였다.
재산은 차와 융자 있는 집 정도였는데 집은 융자금 빼고 똑같이 반띵! 차는 유책배우자님 그냥 가져가시고, 집안 살림 중 원하는 것 있으시면 그것도 유책배우자님 가져가시고~
그리고 지금도 가슴 아프지만 딸아이는 내가, 아들은 유책배우자님이 키우기로 했다. 이유는 묻지 말자. 합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어쨌거나 손자병법의 두 전략 덕에 무탈하게(?) 합의해 이혼과정에서 그 흔한 다툼도 갈등도 없이 나는 이혼을 아름답게 성공했다.
2014년 7월 20일 일요일이었다.
날짜까지 정확히 아는 이유는 아이들 사진첩과 육아일기로 사용했던 카카오스토리에 고스란히 그날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나의 일기에는 딸아이가 먼저 유치원에서 수족구를 걸려와 자다가도 소리 지를 만큼 아파하며 6일을 앓았다고 쓰여 있다. 딸아이가 다 나아갈 즈음에 이제는 돌이 안 된 아들이 수족구에 걸렸다며 아이의 무릎, 손등에 잔뜩 퍼진 수족구 사진까지 있었다.
그래서 거의 1주일이 넘는 동안에 잠을 자지 못해 너무 힘들다는 말들이 있었는데 일요일임에도 출근을 한다고 준비 중인 유책배우자님이 안 나갔으면 좋겠다며 ‘ㅠㅠ’까지 써놓았더라.
그날 안거다. 그의 외도를.
일요일 출근이 아니라 외도 데이트를 하러 간 거다. 그때 유책배우자님이 170만 원을 벌어왔고 생활하기에 턱 없이 부족해 가까이 사시는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도움을 좀 받았는데 통장에 남은 3만 원을 갖고 대실을 했더라. 돈 없다고 외도 못하는 거 아니더라.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영화 <파묘>를 자문한 무당 고춘자 선생님도 나의 촉을 인정(?)했다. 평소처럼 행동한 그인데 이상하게 잠이 안 오고 휴대폰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집 주변에 있는 사람과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고 채팅도 가능한 그런 이상한 어플이 깔려 있었긴 했지만 그냥 호기심에 깔았다고 우겨대니 더는 묻지 않았다. 사실 그 일조차도 잊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휴대폰을 보고 싶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진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 하하.
그때 유책배우자님은 휴대폰이 패턴으로 잠겨있어 이혼으로 가는 1차 관문 실패!
요즘은 지문이 남지 않는 필름들이 잘 나와 있지만 그땐 형광등 불에 비춰보면 지문이 보이기도 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는 그대로 풀어보려는데 사실 뭐 되겠어요? 아 실패다! 하며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의심한 나를 반성하고 슥슥~ 생각 없이 패턴을 그렸는데 어머나 이. 게. 풀. 린. 다. 지금도 어떻게 풀렸는지 알 수 없다. 정말 의문이다. 마치 하늘이 그간 가정에 헌신한 나를 고생했다며 ‘이제 그만 이혼으로 너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겠노라’며 계시(?)를 받는 것 같았다. 이혼으로 가는 1차 관문 어쩌다 통과!
이제 뒤져보자. 통화내역 이상 무! 카톡 내역 이상 무! 문자 내역 이상 무! 깨~끗했다. 이혼으로 가는 2차 관문 실패! 나는 또 나를 탓했다. 내가 미쳐가는구나. 진짜 꼴~ 보기 싫은 나의 모습이었다.
휴대폰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려는 순간!
또 미친 듯이 어떤 것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아이를 돌보며 엄마랑 통화를 자주 했는데 간혹 실수로 스피커폰을 누른다는 게 옆에 있는 녹음 버튼을 눌러 나도 모르는 통화녹음이 기록된 적이 있었다. ‘이것도 없으면 나는 정말 심~하게 반성하고 정신건강을 좀 잘 챙기자’는 마음으로 음성녹음 목록을 찾았다. 어떻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 이혼으로 가는 2차 관문................. '타고난 촉'으로 통과!
녹음된 파일에는 어떤 여자에게 노래를 불러주더라.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 전문용어를 좀 쓰자면 지X버렁을 하더라. 그러면서 어제는 네가 나의 기를 빨아가서 오늘 피곤했다는 둥 여기서 더 쓸 수는 없지만 완벽하게 외도를 했다는 빼박 증거였다.
바로 이혼을 결정하진 않았다. 최고의 조언가인 엄마도 '아이들도 너무 어린데 좀 더 노력해 보자'며 유책배우자님에게 50만 원의 돈을 쥐어주며 애들을 봐줄 테니 둘이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거나 근처에 나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둘이 잘 풀어보라'라고 했다.
내가 여기서 미련 없이 관계를 끝내는 최고의 방법을 알려줄까 한다.
매달려도 보고 할 수 있는 미련이 안 남을 만큼 상대에게 모든 것을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나한테 질려서 마음이 뚝! 하고 끊기는 게 느껴진다. 다시는 애정도, 애증조차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해진다.
그땐 진짜 법원 앞으로!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빠르게! 오픈런해야 한다.
그래서 노력해 봤다. 하지만 이후로도 신뢰를 주는 노력이 없자 나는 이혼을 하지 않으면 내가 의심병 환자가 되어 정말 미친 사람이 될 것 같아 두려웠다. 하필 그때 모든 악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여름이라 모든 창문을 열어 뒀는데 아들이 기어 다니다 문이 쾅 닫히면서 오른손 약지 손가락 한마디가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뼈를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식수술까지 하느라 두 번 수술을 진행했고 그 어린것을 차가운 수술침대에 혼자 눕혀두고 약에 의해 잠들게 하고 나서야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같이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아이가 수술대에 누우려 하지 않고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품에서 떼어내려는 데 어찌나 힘이 센 지 떼어내려 할수록 내게 더욱 꽉 안겼다. 그런 아이가 약에 의해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눈물을 갑자기 뚝! 그쳤다기보다 끊겼다는 표현이 맞다.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 모습이 마음이 이미 약해 질대로 약해진 나한테는 너무 충격적이고 마음이 아파 입원한 내내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병원에서 1달을 아이와 지내며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하루하루를 산송장처럼 지내며 겨우겨우 버텨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책배우자님은 일까지 그만두게 되었고 마주치기만 하면 죽일 듯이 다투는 일들에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마음도 빠르게 사라져 갔다.
부부가 살아야 될 이유가 단 한 가지라도 있으면 사는 거라는데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이유를 단 한 가지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때마침 하늘이 내려 준 동화줄을 이제 나는 단단히 붙잡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유책배우자님이 밉냐고?
아니다. 진심으로. 미련이 없어서인지 밉지도 않다. 미운 마음조차 없다. 오히려 아들을 키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가 늘 잘 되길 응원해 줬고 지금도 진심으로 응원한다. 가끔 아들 데려오는 걸 무기 삼으며 말도 안 되는 악법 같은 걸 내세워 무조건 따르게 할 때는 으르렁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
내가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한 지난 시간을 힘들게 겪고 우울감에 시달릴 때도 그는 내가 미워한다고 아파하고 속상해하지 않는다. 아무 타격감이 없다. 내가 밉다, 용서 못해라는 마음으로 살아봤자 초등학생들이 자주 사용하는 유치 하지만 강력한 "반사"라는 말 한마디를 받아 모든 게 무산되는 것처럼 미워할수록 용서하지 못할수록 나만 당하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은 잘 살고 있는데 왜 내가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억울했다. 미움을 갖고 살던 나는 가해자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는 피해자를 자처했다고나 할까.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이 나를 까맣게 태워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움마저 미련인 것 같아 미움을 버렸다. 용서를 구하지 않았어도 내 마음에서는 깔끔하게 용서했다.
그리고 유책배우자님에 대한 생각과 그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나에게 이혼은 유책배우자님
'너 때문에!'가 아니라,
'네 덕분에!'
새로운 삶을 다시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그러면서 새로운 삶을 위해 나 스스로도 새로워지겠다고 다짐하면서 모든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며 유책배우자님을 바로 승진시켜주었다.
‘전남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