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버몬트
보스턴 공항의 렌터카 사건은 사실 우리 이번 여행을 전체적으로 지배했어요. 차를 타고 달리는 로드트립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게 어떤 차를 빌리게 되느냐에 따라 여행의 분위기가 변하거든요.
우리가 미국여행을 할 때마다 이용하는 렌터카 회사는 내셔널 렌터카예요. 목적지 공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차를 빌리러 가는데 저는 그 시간이 가장 설레요.
렌터카 사무실을 들를 필요도 없이 지정된 주차구역에 주차되어 있는 차 중에서 마음에 드는 차를 골라 타고 나가면 되거든요. 그럴 때면 마치 새 차를 마음껏 사는 기분도 들고, 직원이 아무도 없으니 차를 훔쳐 도망치는 기분도 들었어요. 그런데 보스턴 공항에서 처음으로 예외가 생긴 거예요.
우리가 도착한 주차장은 텅 비어있었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지요. 이번에는 우리가 주차장에 자동차처럼 줄 맞춰 서서 주인을 기다리게 됐어요. 차가 우리를 데려가는 방법이 된 것이에요. 빨리 호텔로 가서 쉬고 싶었지만 새로운 경험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우리보다 앞서 기다리던 아저씨들이 BMW, 벤츠, 아우디 등 평소 렌터카 회사에서 흔하게 빌릴 수 없는 차를 타고 떠났었어요. 그중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픽업트럭도 있었고, 미니 밴도 있었어요. 나는 스포츠카 스타일의 BMW가 오길 기다렸고, 아빠는 적당히 큰 SUV가 도착하길 바랐어요.
하지만 2시간의 기다림 끝에 우리 앞에 나타난 차는 캐나다 번호판을 갖고 있는 기아의 소형 SUV였어요. 난 너무 작아서 실망했는데, 엄마 아빠는 애써 좋은 차라고 만족감을 보이면서 저를 위로하려고 하셨지요.
이 차를 타고 우리가 미국 동부의 로드트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서양인에 비해서는 우리 가족이 체구가 작긴 하지만 작은 차 한 대에 세 명이 몸을 구겨 넣고, 트렁크에는 캐리어를 가득 실은 채 2개 주를 거쳐 뉴저지주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요.
그 여정에 처음으로 찍은 곳이 버몬트주입니다.
엄마와 내가 좋아하는 벤 앤 제리 아이스크림 농장이 있는 곳이라 아이스크림 공장에 가는 것을 기대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 들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니 아쉬움이 남았어요.
우리는 버몬트주 경계에 있는 웰컴센터에 들렀어요. 유난히 좁은 차를 타고 달리다가 탁 트인 웰컴센터에 들르니 기분이 좋아졌어요. 엄마는 나무가구들과 따뜻한 분위기가 좋다고 계속 사진을 찍었어요. 지도 앞에서 어떻게든 엄마와 합심해서 밴 앤 제리 공장을 가자고 아빠를 설득할 계획이었는데….. 엄마는 쿨하게 여기는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때 우리의 첫 목적지로 벤 앤 제리 아이스크림 공장투어를 하자고 말씀하셨어요.
엄마가 버몬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일 번으로 아이스크림을 선택해 주시니 아쉬운 마음이 달콤하게 녹아버렸어요.
엄마와 제가 오랜 시간 투자하여 여행을 한다면 다시 선택할 곳, 버몬트 주입니다!
8) 코네티컷
우리의 계획대로 쉬를 하기 위해 겸사겸사 멈추게 된 주가 바로 코네티컷이에요. 최종 목적지는 엄마와 친한 이모가 얼마 전에 한국에서 뉴저지로 이사 와서 그곳에 가는 길 이이었지요. 이모가 우리를 위해 저녁을 준비해 주신다고 하여 끼니를 절대 빼놓지 않는 우리 가족은 이번에는 간단하게 휴게소에서 도넛을 먹기로 했어요.
우리나라의 휴게소와 비교하면 10분의 1도 안 되는(아마도 100:1) 규모의 휴게소였어요. 화장실과 매점, 지도만 있는 곳. 그래도 잠시 들러 화장실을 해결하고, 매점에서 뭘 사달라고 졸라볼까.. 열심히 구경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갖고 싶은 것이 없는 매점이었어요.
바로 옆 도넛가게로 갔어요. 도넛을 사려고 옆에서 기다리던 할머니가 손주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귀엽게 봐주셔서 쑥스러웠어요. 등교하지 않은 저를 보고 방학인지,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셨어요. 날씨가 추워서 일까할머니가 건네는 ‘스몰토크’가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엄마와 아빠는 동부에 오니 상상하던 미국의 느낌이 난다고 하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산호세보다 코네티컷이 영화나 책에서 보던 미국감성이 느껴진다고요. 생각해 보니 어느새 산호세의 집들은 익숙한데 이곳의 집 모양은 분위기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엄마는 이 지역에 있는 집 모양은 지붕이 뾰족해서 예쁘다며, 너무 낡아 보이는 집까지 가리키며 저와 아빠에게 빨리 보라고 이야기하느라 바쁘셨지요.
엄마는 아빠보다 잡학이 많지는 않지만 그때그때 느껴지는 대로 추측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이 동네의 집이 뾰족한 이유는 아마 눈이 많이 내리면 치우기 힘들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설계된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눈이 소복하게 쌓인 휴게소의 모습도 상상해 봐요.
얼마나 재밌을까요?
옆에 계신 아빠는 3시만 넘어도 어두워지려고 하는 동부의 겨울이 뭐가 좋냐고 핀잔을 주셨지요. 하지만 엄마는 이 어두움이 서부의 강한 햇빛보다 좋을 때가 있다고 하세요. 저도 동의해요. 이럴 때는 엄마의 말에 동의가 잘 되는 순간이에요.
비가 올 것 같은 어두움이 좋아요. 빗속을 뚫고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 좋아요. 눈 위에 누워버리는 것은 최고예요. 캘리포니아는 이런 날씨가 이어질 것 같은 아침은 있지만, 등교해서 리세스 시간이 되면 대부분 햇빛이 나와요. 그래서 우리 학교는 건물과 건물사이에 지붕이 필요 없나 봐요. 큰 강당도 필요 없는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