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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호 Oct 16. 2024

미국 50개 주 정복하기

우리 엄마는 가끔씩 책을 골라주세요. 대부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지만, 처음 건네받을 때는 항상 읽기 싫은 마음이 커져요. 그날도 그렇게 엄마가 건네준 책을 읽으면서 ‘땅따먹기’라는 놀이를 알게 됐어요.  엄마도 어릴 적에 많이 했다고 해서 직접 해보기로 했어요. 학교에서 한참을 놀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워 집 앞마당에서 한판만 더 하자고 졸랐어요. 운동장 하고는 달리 흙이 없고 시멘트 바닥이라 분필로 선명하게 선을 그어 가면서 또 한 번 신나게 했지요. 학교에서는 엄마가 땅을 모두 정복했지만, 마당에서는 제가 넓게 땅을 따 먹기 시작했어요. 열심히 돌을 튕기는데, 지나가던 동네 할아버지께서 궁금해하며 다가왔어요. 버나드 할아버지도 한 두어 번 같이 한 후 이 놀이의 이름을 물어봤는데 엄마와 저는 대답하기 참 곤란했어요. Eating territory? Bite ground? 땅따먹기라는 놀이를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왜냐하면 여기는 미국이거든요.


저는 이제 10살입니다.  한국나이 9살이 끝나기 3일 전에 미국으로 이사 왔어요. 그래서 그날부터 다시 9살을 시작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미국생활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었고, 저는 당장 미국친구들을 만날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한국에서부터 친구들과 재밌게 노는 법을 알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자신 있게 시작한 미국학교 생활은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어요. 이건 비밀이지만, 때때로 화장실에 숨어서 눈물을 흘리며 분을 삭일 만큼 힘든 일도 있었지요.


엄마한테 이야기하면 위로해 주는 것은 잠시 뿐이고 한국에 돌아가면 지켜야 하는 일들에 대해  잔소리로 답해주실 때가 많았어요. 그리고 학교 가서 아빠의 조언대로 행동했더니 친구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했어요. 가장 답답할 때는 선생님이 제 편이 아닌 기분이 들 때였어요. 그동안 학교에서 문제가 생기면 항상 선생님께 도움 요청을 하라고 하셨는데 해결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것이 미국과 한국이 가장 다른 점 같아요. 이럴 때면 집으로 도망갈 수도 없고, 화장실로 잠시 피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 학교에서도 매일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지만 내 곁에는 함께 기분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선생님의 꾸지람에 억울했지만 반성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아니에요. 미국 학교에서는 자꾸만 내가 그동안 한국에서 배우고 익혀 왔던 것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 같아요.  미국의 모든 것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고 저는 작아지는 기분이었어요.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항상 지는 기분이 들었지요. 마치 땅따먹기 놀이를 할 때처럼 미국땅에서 출발한 묵지가 나를 세 번 만에 묶어 다시 미국 영토로 끌고 가면, 그곳에서 저는 정복당하는 것이죠.


내가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기분이 들었어요. 나의 학교생활에는 평화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이 느껴졌어요.  내 방에서 펑펑 울어봤지만 해결할 수는 없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데려가 주겠다는 엄마의 답은 이번에도 어쩐지 따르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내 마음을 알게 됐어요. 꼭 이곳에서 즐거운 하루를 만들고 싶다는 것을요. 미국사람들이 항상 기분 좋게 건네는 인사 “Have a good one!”을 이루고 싶었어요.


상담선생님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어요. 수업 시간도 더욱 열심히 참여했지요. 저는 매일매일 씩씩하게 등교했어요.

3학년 되어 지리시간에 미국의 50개 주를 배우던 어느 날, 드디어 한 가지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어요.

“엄마! 아빠! 나 미국의 모든 주를 다 가보고 싶어! 내가 50개 주를 모두 직접 다 밟아보 보면 기분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이 나라를 아쉬움 없이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미국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의 답답함이 해결될 것 같았어요.

이런 엉뚱한 저의 한마디에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 아빠는 1초의 고민도 없이 좋다고 응원해 주셨고, 아빠는 곧장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우리에게 미국에서 주어진 시간은 2년 3개월.

50개 주 중에 그동안 내가 다녀온 주는 16개 주.  

지금부터 방문해야 하는 곳은 34개의 주가 남고,

1년에 17개의 주를 여행해야 했어요.


아빠는 휴일과 휴가를 이용해서 일 년에 3번 정도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고 하셨어요. 한 번의 여행에 약 6개 주를 방문하고 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아빠는 저보다 더 신이 나서 재빨리 계산해 냈지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미국 50개 주 정복을 위한 여행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날 이후, 매일 하던 땅따먹기 놀이처럼, 지도에 선을 그어가며  우리 가족만의 땅따먹기  놀이를 만들어갔어요. 한 번의 여행으로 많은 주를 찍기 위해 최적의 동선을 만들고, 우리가 방문했다고 인증할 방법으로는 웰컴센터 방문, 표지판 사진촬영, 그리고 휴게소에 들르는 것으로 정했어요. 엄마는 강아지들이 영역표시 하는 것 같다며 마지막 방법을 정할 때 재밌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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