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은 참으로 많이도 이사를 다녔더랬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사의 시작은
여섯 살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일명 사글세라 부르는 형식으로
일정한 때가 되면 어김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집주인이 찾아와 월세를 올려야 한다 말하는 날이면,
엄마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나와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이곳저곳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다 형편에 맞는 집을 발견하게 되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계약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우리 집은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때부터
중,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까지 단칸방이었던 우리 집은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서 중,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여동생과 함께 쓰는 방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사를 다니는 것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나는 전학을 다니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나면
또 전학을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어쩌다 옆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어
굳이 전학을 가지 않아도 되었을 때면 그렇게 좋았다.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더 멀어지더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하교하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 늦어질 뿐이었다.
이사를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전학도 가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떨어지는 날이면
나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전학까지 가야 하냐며 큰소리 한번 낼 법했지만
내가 엄마에게 소리 지르며 따진다 한들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속으로 또 한 번
아이들과 헤어질 것을 슬퍼해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커서 어른이 되면 무조건 한 지역에서 오래 살거라 다짐했다.
우리 아이도 한 동네에서 오래 살면서
학교친구, 동네친구를 두루두루 많이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지하 단칸방이 아니라 아주아주 높은 건물에서 살고 싶었다.
서른, 나의 집이란 거대한 꿈이 현실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거대한 꿈을 향해 한 발짝 더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고 첫 번째 이사를 맞이했다.
신혼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집이었다.
퇴근을 하고 너무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길목이 너무도 어두워
무서웠고 4층까지 걸어 올라가다 보면 다리가 아파왔다,
전세계약기간이 되어 우리는 바로 다른 전셋집을 알아보며 첫 이사준비를 했다.
신랑의 배려로 내 직장에 가까운 아파트가 우리가 살 집이 되었다.
어릴 적 늘 단칸방에 살던 내가
높은 층수의 아파트에 살 날이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음속에 꿈을 고이고이 접어 두고 살다 보니,
그것을 어느 순간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다 싶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남편과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나눈 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남편에게 조용해 그랬다.
내가 당신을 만나 아파트란 곳에서도 살아보게 되다니...
그 뒷 말을 더 붙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그저 좋았고 그저 설레었을 뿐이다. 그래서 웃음이 그치지 않았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