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쌓인 눈

by 이윤지

첫째 아이는 두 돌 무렵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말이 아직 트이지 않은 아이와 온종일 집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그 시간이 계속되다 보면 답답하고 외롭다는 감정이 스며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세 번, 규칙적으로 아파트 산책길로 나가곤 했다. 마치 숨구멍처럼.


유모차에 아이를 태울 때면 등받이 각도는 늘 살짝 기울인 정도였다. 너무 눕히면 금세 지루해하고 너무 세우면 불편해 보였기에 그 중간 어딘가에서 타협했다. 산책길을 걷는 동안 나는 매일 같은 코스를 돌면서도 아이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싶었다. 어린이집에 가기 전 말문이 조금이라도 트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길 위에서 가능한 많은 언어 자극을 시도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이웃을 마주치면 “멍멍아, 안녕?”하고 인사했고, 길고양이가 슬쩍 모습을 드러내면 “야옹아, 어디가~?” 하고 말을 붙였다. 바람이 부는 순간엔 “아이 시원해~ 바람이 솔솔 불어오네~ 바람이 주원이랑 엄마 얼굴을 간지럽히네~” 하고, 쌓여 있는 나뭇잎 위를 일부러 밟으며 “바스락바스락 소리 나네, 재미있는 소리네.” 하고 말하곤 했다. 사실상 나는 거의 혼잣말을 했지만, 그 시간이 이상하게도 꽤 충만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대부분 조용히 내 말을 듣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반응할 뿐이었다. 말은 여전히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가 갑자기 검지를 들어 무언가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눈은 동그랗게 커졌고 입술도 오므려지며 “오! 오, 오!”하고 감탄에 가까운 옹알이를 내뱉었다. 처음엔 그냥 내가 웃긴 줄 알고 쳐다봤지만, 아이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닌 그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뭔가 특별한 걸 본 것 같았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들어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


이럴 수가! 그 순간 나도 숨이 멎을 뻔했다. 한여름의 대낮, 파란 하늘 아래 가로수 나뭇가지에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것처럼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얼핏 보면 눈송이 같기도 한 그 꽃들. 몇 년째 이 동네에 살면서, 여름에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는 걸 왜 몰랐을까? 그 나무는 이팝나무였다. 출산 전부터 이 길을 수없이 오갔지만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손끝 하나가, 시선 하나가 이팝나무의 존재를 내게 알려주었다.


이팝나무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우리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길을 걸을 때마다 그 순간의 내 앞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아이의 표정, 그 눈빛, 그리고 바람결에 흔들리던 하얀 꽃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날을 계기로 말이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됐다. 말보다 앞선 감각이 있고, 말보다 먼저 세상을 알아채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아이를 통해 배웠다. 아이는 여전히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 눈빛 하나로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건 대단하거나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아이를 통해 서서히 깨달아갔다.


하늘, 구름, 나뭇잎, 새, 나비, 벌, 그리고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멍멍이와 야옹이들. 그런 평범하고도 자그마한 존재들이 나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색이 바뀌는 나뭇잎 하나에도 아이는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고, 나는 그 아이 옆에서 처음 보는 듯한 눈으로 자연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떤 날은 산책길에서 발견한 민들레 홀씨 하나에도 아이는 숨을 죽이고 집중했고, 나는 그런 아이의 눈길을 따라 내 마음도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이전엔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풍경들이 이제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머물게 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이렇게 섬세하고 다정했던가? 아이는 말없이 그런 것들을 알려주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손끝 하나, 눈빛 하나로 많은 것을 느끼고 공유할 수 있다는 걸 매일매일 가르쳐주었다.


말이라는 건 어쩌면 그 아름다움을 포착해내고 기억에 담기 위한 또 하나의 도구일지도 모른다. 말이 조금 느려도 상관없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나누고 있었고 그 느린 속도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keyword
이전 01화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