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웃음

by 이윤지

장마가 막 끝난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오랜만에 말끔하게 갰지만 땅 위에는 여전히 지난 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파트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니 중간중간에 빗물이 채 마르지 않은 웅덩이들이 보였다. 물이 고인 자리에는 근처 화단에서 흘러내린 흙이 섞여 있었고 작은 웅덩이들은 하나같이 뿌옇고 탁한 흙탕물로 가득했다. 이런 흙탕물 웅덩이는 두 돌짜리 아이의 눈에는 보물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꼭 맞춰 놓은 것처럼 아이의 시야에 포착된 웅덩이 앞에서 아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오른발로 착! 왼발까지 착! 한 번에 두 발을 모두 담가버렸다.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샌들과 양말이 금세 젖었고 반바지 위로 흙탕물이 튀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가방을 뒤져 물티슈를 꺼내고 여벌 양말을 찾아 신기며 “거기 들어가지 말랬지!” 하고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집에 도착하면 수건 몇 장 깔고 현관에서 옷 벗긴 다음 화장실에서 씻기면 그만이었다. 옷은 물에 한 번 헹궈서 세탁기에 넣으면 되는 일.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기회를 준 적이 없었다. 매번 걱정과 예측이 앞섰고, 아이가 다치지는 않을까,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었다. 오늘만큼은 그런 생각들이 신기하게도 자취를 감췄다.


엄마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챈 건지 아이는 더 신이 나서 흙탕물 속에서 발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작은 발로 첨벙, 첨벙 소리를 내며 웅덩이를 오가고, 얼굴에는 해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 파인애플 장난감을 흙탕물에 넣고는 뭔가 요리하듯 휘적휘적 저었고, 작은 공룡 장난감은 물속에 담가 수영하는 시늉을 했다. 눈빛은 초롱초롱했고, 입에서는 ‘아아~ 오오~’ 같은 옹알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말은 아직 트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담겨 있었다.

'엄마, 나 지금 정말 즐거워!'


나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지켜봤다. 사실 이런 상황도, 이런 내 마음도 모두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색했다. 말없이 아이의 손길을 따라가고 흙탕물을 튀기며 노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아이 옆에 무릎을 꿇고 함께 물장구를 쳤다. 두 손으로 물을 떠 튀기면 아이는 배꼽 잡고 웃었다. 내 치맛자락에도 흙물이 튀었지만 그건 그저 즐거움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비로소 함께 놀기 시작했다. 나도 아이처럼 손을 흙탕물에 넣고 장난감을 같이 씻어보기도 했다. 아이가 나를 한번 힐끗 바라보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감을 건네줬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언어보다 먼저 도착한 교감이 있었다. 아이는 내가 함께 놀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정말 재미있다. 엄마도 너랑 노니까 너무 좋아.” 아이는 다시 깔깔 웃으며 물을 첨벙거렸다.


이 아이는 기저 질환을 가지고 있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제한적이다. 또한 말도 또래보다 느려서 아직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즉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지 못해서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르는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는 어쩌면 더 귀하고 소중할지도 모른다. 제한이 많은 삶 속에서 이런 작고 사소한 자유는 아주 큰 기쁨이 되어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만큼은 이 평범한 흙탕물 웅덩이가 아이에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놀이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젖은 바지를 붙잡고 깔깔대는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의 웃음과 그 웃음을 끌어낸 이 작은 순간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잠시 내려놓은 통제와 걱정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자유와 웃음을 선물했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언젠가 또 다른 길 위에서 물웅덩이를 만났을 때 아이가 오늘 우리가 함께 첨벙거렸던 이 시간을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엄마랑 같이 놀았던 그 웅덩이네. 그날 참 좋았지.’와 같은 기억으로 이 하루가 아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비가 그치고 맑은 날의 흙탕물처럼 순간은 흐르고 사라지지만, 그 안에서 피어난 웃음은 오래도록 반짝였으면 한다.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그 웃음이 이 아이의 마음에도, 나의 기억 속에도 오래오래 맑게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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