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말, 준비된 나
낮 시간을 혼자 보내는 일은 어느새 익숙해졌다. 마트에 가는 일도 이제는 루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장보기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조용히 확인받는 의식에 가까웠다.
나는 늘 장바구니를 챙겼다. 혹시라도 점원이 말을 걸면 어쩌지, 내가 그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그 짧은 순간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준비해 간 장바구니는 물건을 담기 위한 용도이기도 했지만, 불안을 막기 위한 방패이기도 했다.
계산대에서 점원이 묻는다.
“Do you need a bag?”
그때 나는 머뭇거림 없이 말한다.
“No, I have my own bag.”
입에 붙이기까지, 나는 며칠을 연습했다. 어쩌면 이건 단순히 '나 봉투 있어요.’가 아니라 “저는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준비돼 있어요.”라는 작고 단단한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제.
“I will pay by card, please.”
이 짧은 문장 하나를 익숙하게 말하기까지 나는 수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카드에는 by이고, 현금은 in인지 전치사를 틀리지 않으려는 사소함조차도 넘어서야 할 문턱처럼 느껴졌다. 영어 유튜브를 찾아보고, 예문을 검색하고, 그 차이를 이해하려 애썼다
지금은 안다. 그 말 하나를 입 밖으로 꺼내는 용기,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는 걸.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 언어를 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계산대에서 “By card, please.” 그 말이 나올 때마다 나는 조금씩 익숙해진다. 이곳에서 혼자 하루를 살아내는 방식으로.
준비된 문장들을 하나씩 꺼내다 보니 어느 순간, 슬로베니아어를 알고 싶어졌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먼저 말 걸 수 있을까. 그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물을 수 있을까. 슬로베니아어로, 이곳의 언어로. 그 생각이 들었던 그날, 나는 이 낯선 언어의 풍경 속에 작은 발을 디뎠다.
그리고 조용히 다음 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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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준비된 문장들 위에, 조금씩 나를 세우고 있습니다.
‘슬로하라 언어일기’의 다음 기록도 함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