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열기 전, 말이 고팠다

읽지 못하는 이방인의 시간

by 슬로하라


슬로베니아에 온 지 세 달을 채울 무렵이었다.

내 일상은 단조롭다 못해 단순해졌고, 그 단순함이 어느 날은 미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트를 다녀오고, 집 근처를 걷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웃과 마주치는 것. 그게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이 동네에 한국인은 나와 남편, 단 둘뿐이다. 우편함을 열어도, 문 밖을 나서도 온통 낯선 글자들뿐이었다. 그 글자들을 읽을 수 없다는 건 단순히 ‘모른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느낌, 그 막막함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려왔다. 남편이 사다준 기초 문법책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투덜대듯 말했다.


“읽을 줄을 알아야 공부를 하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핑계였다.


내 안에는 갈증이 있었다. 무언가 배우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그저 떼쓰는 아이처럼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고, 말의 모양이라도 익히고 싶던 그 마음은, 무작정 애쓰던 날들 속에 조용히 건네진 작은 도움 하나를 통해 조금씩 소리를 갖게 되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막막했던 말들의 틈 사이로, 조금씩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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