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과일부터 외웠다
남편이 슬로베니아에 먼저 도착한 건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나는 세 달쯤 뒤에 그를 따라왔다. 한국에 있으면서 슬로베니아어에 대해 찾아보았다. 아주 기초적인 준비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정보는 없었다.
구글은 슬로베니아의 와인과 풍경은 넘치게 알려주었지만, 언어에 대해서는 당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이버에는 짤막한 인사말과 몇 가지 표현이 전부였다. 알파벳, 발음, 문법에 관한 설명은 거의 찾기 어려웠다. GPT도 모르던 때였다. 게다가 구글번역 역시 슬로베니아어는 낯선 모양이었다. 발음을 듣기도, 제대로 된 번역도 정확하지 않았음을 뒤에 알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줄였다.
“적어도, 읽을 수는 있어야지.”
그게 나의 시작이었다.
내 일상의 동선은 단순했다. 마트를 오가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웃과 마주치는 것. 낯선 공간에서 낮에 혼자 지내며 나는 작은 것들부터 언어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트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과일 코너가 나를 반긴다.
Jagoda. 딸기.
Jabolko. 사과.
단어들이 선반 위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읽고 싶었다. 뜻을 몰라도 괜찮았다. 입 안으로 조용히 흘려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감각이 생겼다.
이웃의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Dober dan!”
처음엔 당황했다. 혹시 대화로 이어질까 봐 얼른 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 인사는,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그래서 나도 배웠다. ‘도브르 단? 도브로 단? 도베르 단?’ 익숙한 어조를 흉내 내어 따라 했다.
도베르 단.
아직은 어색했지만, 나의 작은 용기였다. 단어 하나를 제대로 듣고 따라 말하는 것도 나에겐 큰 일이었다.
정육 코너에서는 고기가 곧 언어였다. 어떤 고기인지, 어느 부위인지, 돼지인지 소인지 대충이라도 알 수 있어야 했다. 나는 라벨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단어를 검색했다.
‘Goveje meso’는 소고기,
‘Svinjski vrat’는 돼지 목살.
고기는 요리가 되었고, 요리는 언어가 되었다. 내 식탁 위에는 단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슬로베니아어를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트에서 과일 이름을 읽고, 이웃의 인사에 웃으며 대답하고, 고기 라벨에서 단어를 찾아내는 그 짧은 순간순간마다 나는 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슬로하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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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스럽지만 꾸준히, 이 언어의 시간을 꿰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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