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 이름을 말했다

서툴렀지만 내 시간을 담은 첫인사

by 슬로하라


헤매고 멈추는 시간이 많던 이 땅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손길을 건넨 이가 있었다. 낯설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는, 두 살 터울의 언니 같은 사람이었다. 과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았고, 조심스러워서 더 깊이 고마웠다. 나보다 먼저 이방인의 시간을 견뎌내며, 그 삶을 차분히 가꾸고 있었다.


그녀의 안내로 외국인을 위한 슬로베니아어 수업을 알게 됐다. 그해 봄, 무턱대고 혼자 수업을 시작했지만 중간에 멈춰야 했다. 몇 달 뒤, 기다리던 가을이 자 이번엔 그녀와 함께 다시 그 교실에 들어섰다.


언어는 새로 시작되었지만, 인연은 그보다 먼저 다가와 있었다. 낯선 시간 속, 누군가는 이미 그 길을 지나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 길의 가장자리에 발을 디뎠다. 깊이 들어서진 못했지만, 멈추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첫 수업에 모인 사람들은 낯설었지만, 공간은 익숙했다. 무엇보다 나를 향해 단정한 미소를 짓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막막했던 공기가 한결 밝아졌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고,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이번에는 어딘가 덜 어색한 내가 있었다. 함께 시작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든든하게 다가왔다.


어김없이 수업은 슬로베니아어로 시작되었다.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또렷하게 다가와 나를 조용히 조여 왔다. 수업이 이어지면서 함께하는 이들의 국적도 하나둘 익혀 갔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마케도니아 … 그리고 한국, 혼자가 아닌 둘. 서로를 잘 몰라도, 모두가 이 교실에서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었다. 그 조용한 동질감이 낯선 긴장을 조금씩 풀어 주었다.


어떤 언어든 처음에는 인사부터 배운다. 나를 소개하고, 상대의 안부를 묻는 것. 그날의 첫 수업만은 아니었지만, 초반 수업을 통해 배운 그 짧은 문장을 따라 말하고 반복하는 동안, 나도 이곳의 생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이 땅에서 쌓여온 시간들이 조금씩 배어 있는 말이었기에 더 정겹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꺼내게 되는 인사였다.


"Me veseli." 만나서 반갑습니다.

"Ime mi je ○○." 제 이름은 ○○입니다.

"Sem iz Južne Koreje."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이름과 국적을 슬로베니아어로 말했다. 어색한 발음, 서툰 순서.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뇌고 나서야 겨우 나온 말이었다.


"Kako ste, in vi?" 잘 지내시나요, 당신은요?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응답했다.


"Dobro." "V redu." "Tako tako."

잘 지내요. 괜찮아요. 그럭저럭이요(별일 없어요).


말은 짧았고, 감정을 담기엔 부족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반가웠다. 내 이름을 이렇게 말할 수 있어 기뻤다. 언어는 아직 서툴렀지만, 그날 내가 꺼낸 인사는 이곳에서 살아낸 나의 시간을 담고 있었다.


낯선 교실에서 내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던 날, 언어보다 마음이 먼저 이곳에 닿았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툴지만, 내 이름과 마음을 처음 이곳에 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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