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짓과 숫자가 오간 짧은 다정함
잔잔한 주말이 되면, 단조로운 바람이 리듬을 더한다. 옆 동네의 크지 않은 쇼핑몰 한두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그저 펼쳐진 풍경 위를 걷고 바라보는 일상에 익숙하다. 조금은 새로운 시선이 필요해질 즈음, 다른 옆 동네에 마실을 나섰다.
작은 광장을 둘러싼 테이블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벼룩 시장이 선 날이었다. 대개는 오래되고 낡아 보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직 쓸모 있는 물건들, 또 다른 쓰임을 기다리는 것들이었다. 때묻은 세월에도 건재한 그 자태들은 구경하는 사람들의 활기를 돋우고 있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잔잔한 노란 무늬의 무언가가 내 눈길을 붙잡았다.
무작정 앞에 가니, 적당한 크기의 베개였다. 할머니께서 직접 꽃씨를 속에 채우고 겉싸개를 입혀 만든 듯했다. 높지도 딱딱하지도 않았다. 때마침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필요한 것을 찾게 되니 반가움이 앞섰다.
순간, 주변의 소란을 뒤로한 채 용기가 생겼다. 나는 슬로베니아어로 입을 열었다.
“Koliko stane to?”
이거 얼마예요?
관광객들 틈에 섞이지 않고, 잠깐이라도 이곳 사람처럼 소통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찬찬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또박또박 슬로베니아어로 숫자를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듣는 건 듣기 시험을 치르는 듯한 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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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어 숫자는 우리말과 달리 순서를 뒤집어 말한다.
우리말은 24를 '이십사' 또는 '스물네'처럼 큰 수가 먼저 오지만, 슬로베니아어는 작은 수가 먼저, 큰 수가 뒤에 온다. 그 사이에는 연결단어 in(그리고)도 함께 붙인다.
예: 24 → štiri-in-dvajset → 4 그리고 20
형식: 작은 수+in(그리고)+큰 수
처음 들었을 땐 순서가 거꾸로인 것 같아 당황했다. 지금도 숫자를 들을 때마다 뒤에서 앞으로 조립하듯 머릿속에서 다시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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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목소리가 끝나자 나는 방금 들은 음절들을 붙잡고 한참을 머릿속에서 조립했다. ‘사… 그리고… 이십…?’ 익숙하지 않은 단어 조각들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퍼즐이 맞춰지듯 가격이 떠올랐다.
영어로도 서툰 우리는 어설픈 질문과 대답을 이어갔다. 그나마 손짓이 더해져 소통은 가능했다. 나는 돈을 건넸고, 할머니는 아담한 크기의 베개를 덤으로 쥐여주셨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라도 할 사람들처럼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선 자리를 떠났다.
오롯이 현지어여야만 했던 그날의 소통은, 요란했고 말은 서툴렀다. 그럼에도 다정함만은 베개 속 꽃씨처럼 곁에 남아 하루의 끝에 포근히 나를 받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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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눌한 말과 손짓을 통한 소통 끝에는 다정함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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