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도 시원해진 날들

Veliko točeno pivo, prosim!

by 슬로하라


쨍쨍히 높은 데서 내리쬐는 햇빛이 온몸을 바싹 메마르게 조였다.

내가 맞이한 슬로베니아의 첫 여름이었다.


건조한 공기 속에서, 피부는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고 땀구멍은 송송 열려 수분 대신 열기를 뱉어냈다. 습기가 짙은 한국의 여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시작이었다.


자연스레 퇴근 무렵의 남편과 집 앞 식당이나 카페를 찾는 시간이 잦아졌다. 목을 축이고 싶을 만큼, 그 계절은 빠르게 목마름을 데려왔다.


"Veliko točeno pivo, prosim!"

생맥주 큰 거 주세요!


메뉴판을 유심히 살피고 외운 내 여름의 첫 문장이었다. 메인 음식보다 먼저 입에 닿은 주문, 의외로 그 말은 금방 내 입에 익었다. 그 말을 먼저 뱉을 때마다 점원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랐고, 조금은 우리도 이 동네 사람처럼 자연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되돌아온 또 하나의 짧은 말.


"Dober tek!"

맛있게 드세요!


무슨 뜻인지 몰라 처음엔 듣고 그저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 말의 어조가 먼저 다정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음식과 함께 건네받은 인사는, 말보다 먼저 마음을 데우는 방식이었다. 그 짧은 인사가 식탁 위에 놓인 마음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인사는, 남편과 단둘이 밥을 먹을 때도, 우리가 집에 손님을 초대했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처음엔 단어 하나 외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야, 다시 시작된 슬로베니아어 수업을 통해 알게 됐다. 맥주를 달라 자신 있게 외치던 그 문장은, 정확히는 혼자일 때 쓰이는 단어 형태였다는 걸 말이다. 두 사람, 세 사람 이상이 함께 주문할 땐 단어의 끝이 달라져야 하는 까다로운 규칙이 있었다.


슬로베니아어 단어의 변화도, 단어를 익히는 것도 여전히 어렵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알게 되는 것들이 나를 조금씩 편안하게 만들었다.


언어보다 먼저 입에 붙은 건 낯선 계절을 견디게 해 준 말 한마디들이었다.


내 여름은, 그렇게 말로도 조금씩 시원해졌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낯선 땅에서 맞이한 첫 여름의 단어는 맥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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