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이 내 입에 닿기까지

짧은 문장의 긴 여정

by 슬로하라


몇몇의 짧은 문장들을 입에 올리기까지, 나는 여러 계절을 천천히 건너왔다.


옆 동네에 참새 방앗간처럼 자주 들르게 되는 가게가 있다. 굳이 필요한 게 없더라도 한 바퀴 돌고 나면 기분이 잠시 환기되는 공간이다.


한국의 유명 뷰티숍처럼 화장품, 생필품, 간식, 잡화류를 두루 파는 곳인데, 화려한 진열과 밝은 조명이 언제나 조금은 나를 어색하게 만든다. 그 공간에서 내가 가장 긴장하는 순간은,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어올 때다.

슬로베니아어로 말을 건네면,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해 어김없이 되물었다.


“Sorry?”


그러면 직원은 익숙한 표정으로 영어로 다시 물어온다.

“Do you need help?”


나는 늘 준비된 방어로 답했다.

“I'm just looking, thanks.”


슬로베니아어로 건네는 친절에는 듣지도, 대답도 어느 하나 익숙해지지 못했다.


여름이 조금씩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고개를 들던 어느 가을의 문턱에서 나는 다시 슬로베니아어 수업을 가장 기초부터 시작했다. 알파벳부터, 동사 한 단어씩 다시 익히고 외우며 귀로 듣고, 입으로 따라 하는 훈련이 반복되던 시간들.


그즈음부터, 나는 이따금 낯익은 단어를 실제 공간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그날도 상점 직원의 익숙한 슬로베니아어 문장이 빠르게 흘러나왔지만, 그중 한 단어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Pomagam?”


'도와드릴까요?’

처음으로, 나는 그 말의 뜻을 귀로 알아들었다.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늘 흘려보내기만 했던 문장이, 그날은 귀에 또렷이 들어왔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 나라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슬로베니아어로 최소한의 대답을 하고 싶어졌다. 익혀 둔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곱씹고, 되뇌며 입에 붙여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최근에는 직원이 다가오면 나는 대답을 조심스레 꺼내 본다.


“Samo malo gledam, hvala.”

저는 그냥 둘러보고 있어요, 고마워요.


"Oprostite, Iščem [...]."

실례합니다, 저는 [...]을 찾고 있어요.


다행히 내가 더듬더듬 그 말을 떠올리며 꺼낼 때,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고르지 못한 숨을 그 직원은 기꺼이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이어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웃음이 오갔다. 소통이 된 순간이었다.


내가 던진 문장이 상대에게 닿았고, 상대는 웃음으로 답해줬다. 말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날의 교류는 내 안에 또렷이 남았다. 짧고 단순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내가 이곳에서 겪어온 긴 시간의 마음이 담겨 있다.


Imam vrečko.

봉투 가지고 있어요.


Potrebujem vrečko, prosim.

봉투 필요해요, 주세요.


이제는 마트에서, 상점에서 익숙하게 대답하는 문장들 또한 그렇다. 사실 이 표현들이 정확한 문장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수업에서 배운 문장을 조합해 보고, GPT에게도 물어보고, 혼자 여러 번 말해 본 끝에 아마 이 정도면 크게 어색하진 않겠지 싶어, 조심스레 꺼낸 말들이었다.


문장 하나를 입에 익히기까지, 나는 계절 몇 번쯤은 천천히 지나야 했다. 이제는 그 문장이 내 입 안에서 조금씩 익숙해진다. 리듬이 붙고, 발음도 덜 어색해졌다.


아직도 모르는 말이 태반이고, 여전히 대화를 이어가기엔 버겁지만, 내가 이해한 말을 내 입으로 대답하는 순간이 분명히 생겨난 것이다.


말이라는 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확장일지도 모른다. 그 작은 확장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내 안의 언어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짧은 문장을 말하기까지, 긴 시간을 천천히 건너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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