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이 소리가 된, 발음의 혼란기
작은 인연의 도움으로 나는 슬로베니아어 알파벳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총 25자.
눈에 익은 글자들이었지만 소리는 전혀 달랐다.
Q, W, X, Y가 없었고, B는 [브], E는 [에], H는... [흐]였다. [흐]는 낯설었다. 한국어의 'ㅎ'보다 거칠고 깊었다. 마치 목구멍을 한 번 쓸고 나오는 숨 같았다. 말보다 숨이 먼저 나가는 기분.
V 발음은 더 헷갈렸다. 어떤 단어에서는 [브]처럼 들리고, 어떤 단어에서는 거의 [우]에 가까운 소리였다. 내 입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가장 큰 난관은 č, š, ž. 알파벳 위에 붙은 작은 체크 기호들. 처음 보는 생김새였고, 익숙한 C, S, Z의 발음에 혀를 더 굴려야 했는데, 흉내 내기 쉽지 않았다.
č는 [츄],
š는 [쉬]와 [슈]의 어딘가,
ž는 [쥬]와 [즈]의 어딘가.
그러나 그보다 더 의외였던 건, J의 발음이었다. J는 우리가 아는 '제이'가 아니라, [여] 또는 [으여]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내 입은 한국식으로 자꾸 '제이'를 찾았고, 내 귀는 낯선 '여'를 받아들여야 했다. 'Jabolko가 야볼코였구나.' 나는 자꾸 헷갈렸다.
“우리 발음으론 이 소리들 구분하는 게 원래 쉽지 않아요.”그 말이 참 이상하게도 내 안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못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배우는 중’이라는 감정으로 옮겨 갔다.
그날, 알파벳뿐 아니라 숫자와 요일, 그리고 궁금했던 몇 가지 단어와 문장을 함께 읽었다. 그 문장들을 소리 내어 말하고 내가 대답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일은 단순한 발음 연습이 아니었다. 말이 통할 수 있다는 감각. 그건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Dober dan.” 안녕하세요.
“Hvala.” 감사합니다.
익숙하지만 입에 안 붙던 이 인사들을 이웃과 마주칠 때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반복하고 또 따라 했다. 내게 입을 여는 방법을 처음으로 알려준 시간이었다.
알파벳이 기호에서 소리가 되고, 그 소리가 내 입에서 한 문장이 되는 일. 그건 생각보다 더 크고 따뜻한 일이다. 그때 처음으로, 이 언어가 단순한 ‘배움’이 아니라 내 삶에 ‘붙고 있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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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전히 서툴지만, 오늘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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