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유로짜리 용기

내 발로 넘은 작은 경계선

by 슬로하라


이 낯선 땅에서 나보다 먼저 이곳을 살아낸 누군가 덕분에, 말을 배울 수 있는 수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방인을 위한 슬로베니아어 수업.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문제는, 그곳에 가려면 마주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 홀로, 버스를 타는 일.


나는 아직 버스를 타본 적이 없었다. 그곳은 바로 옆 동네였지만 도보로는 만만치 않았고, 일하는 남편의 시간을 무턱대고 빌릴 수는 없었다. 남편이 알려준 대로 버스 시간표를 숙지하고, 집에서 멀지 않은 정류장을 오가는 연습도 머릿속으로 그렸다.


버스는 자주 오지 않았다. 배차 간격은 40분에서 1시간. 놓치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수업은 오전 11시 30분. 차로 15분 거리 남짓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서둘러 집을 나섰다.


게다가 이 작은 동네를 오가는 버스는 번호도 없다. 정류장이라고 해 봐야 차선 바닥에 "BUS"라고 쓰인 게 전부다. 그 앞에 서서 그저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겹게도 정류장 옆엔 종이로 출력한 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었고, 나는 그 시간표를 몇 번이고 올려다봤다. 시간표에 적힌 시각에서 2-3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며 조금씩 마음이 초조해지려는 찰나, 버스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먼저 버스를 타 보았던, 남편의 조언 실행에 옮겨야 하는 순간이었다.


가능한 한, 기사님께 인사부터 건넬 것.

목적지를 말할 때, 짧게라도 현지어로 말할 것.


현금 결제가 기본이라 2유로짜리 동전도 야무지게 준비해 둔 터였다. 마음속으로는 꽤나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지만, 막상 기사님과 눈을 마주치자, 입 밖으로 겨우 나온 짧은 그 문장이 끝자락에서는 흐려졌다.


"Dober dan, [OOO] prosim..."


기사님은 긴장이 역력한 내 눈을 한번 쓰윽 보고선, 잔돈 건네며 소탈하게 웃어주었다.

'후- 통과했다.'


버스 안에는 예상보다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나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려 서둘러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 어색한 몸짓이 눈에 띌까, 혼자만 이방인처럼 보일까 싶은 괜한 마음이 먼저 앞서 가방 끈을 꼭 쥐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으로는 초록빛 바다와 푸른 하늘이 시야 가까이 다가왔다. 햇빛이 바다에 내려앉아, 그 위를 가늘고 투명한 바람이 건너가는 풍경. 계절답지 않은 따스함에 잠시나마 마음이 풀렸다. 하지만 그 고요도, 터널 앞에서 잠시 숨을 죽였다.


버스는 점점 속도를 높였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속도를 내며 들어섰다. 그 터널은 내가 사는 동네와 내가 가야 할 동네를 잇는 하나뿐인 길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 몸을 낮추고 마음을 고쳐 앉았다. 마치 그 터널은 내가 통과하길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이제 건너야 해. 너 건너가도, 괜찮아.’

어쩌면, 그건 이곳에서 처음 내 발로 넘은 작은 경계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길지 않은 터널을 통과하자 이내 내릴 곳이 보였다. 그 동네의 중심 정류장,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문이 열리자마자 그 틈 사이로 나도 자연스럽게 발을 디뎠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나는 아주 조용한 승리를 품고 있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스레 꺼낸 짧은 말 속에도, 저만의 용기를 담아보았습니다.
‘슬로하라 언어일기’의 다음 기록도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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