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구체가 된 시간
슬로베니아어 수업의 첫 문을 열던 순간, 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꺼냈다. 말을 배우겠다는 건, 틀릴 준비를 한다는 것. 아직 입에 붙지도 않은 단어들을 겨우겨우 붙잡아 보겠다는 각오 같은 거였다.
그 수업은 9월에 시작해 6월에 끝나는 A1 과정이었고, 내가 합류한 3월은 이미 절반을 훌쩍 넘긴 시점이었다. 수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슬로베니아어로만 진행됐다.
슬로베니아어로 가득 찬 종이를 받아 들었다. 도무지 영어로는 유추할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폰에 번역기를 켜 글자들을 비춰 가며 슬로베니아어–영어–한국어로 계속 단어와 문장을 바꿔 읽었다. 뜻은 몰라도 그 낯선 문자들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읽을 수 있든 없든, 내 입 안에 한 자 한 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알파벳의 발음을 되뇌고, 모양과 소리를 내 안에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문자들이 내 입술에 맺히고, 목을 지나 내 숨에 실려 소리가 되기를 애썼다. 그저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문자의 몸을 먼저 익히는 일이었다.
m / ž / s / ed / dv / mn...
칠판에 썼다 지워지는 무언가의 약자들, 단어는 형태가 자꾸 바뀌었고, 그 단어들의 원형은 짐작조차 어려웠다. 슬로베니아어로만 말하는 선생님과 학생들 틈에서 수업 내내 내 집중력을 부둥켜안아야만 하는 수행 같았다. 그 수업에서 가장 익숙한 건 내 손에 쥔 번역기였다. 다정한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물음표만 가득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문장 사이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하지만 한 문장을 채 해석하기도 전에 선생님의 말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고, 나는 또 그 뒤를 멀찍이 겨우 따라가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 그 수업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그날은 존재가 구체가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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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틀릴 준비를 위한 시간을 꿰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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