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가 살던 동네에는 출근길마다 마주치는 어르신이 계셨다.
작고 마른 몸으로 커다란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였다.
리어카에는 폐지가 가득 실려 있었는데,
그 무게가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도로 옆을 따라 위태롭게 걸어가실 때도 있었고,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보폭은 작고 걸음은 느렸지만,
하루하루 이어지는 그 발걸음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내가 그 동네를 떠나는 날 아침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리어카를 끌고 계셨다.
요즘 나는 출근 전에 집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돈다.
이른 새벽, 5시 반쯤.
해가 뜨기 전이라 공기는 선선하고, 하늘은 어둑하다.
그 시간에는 젊은 사람보다 어르신들이 훨씬 많다.
마치 그곳은 어르신들의 시간인 것만 같다.
나는 그곳에서 두 분의 단골 손님 같은 어르신을 늘 마주한다.
한 분은 편마비가 있으신 분이다.
왼쪽 팔과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지만,
공원을 묵묵히 걸으신다.
우리 동네 공원은 단순한 평지가 아니라 오르막도 있는데
처음 그 분을 봤을 때는 걱정이 앞섰다.
‘저 오르막을 과연 오르실 수 있을까’
하지만 한 발, 또 한 발 힘겹게 딛고 결국 오르막을 넘어가시는 모습을 보며
진짜 힘은 속도보다 포기하지 않고 이어지는 한 걸음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 한 분은 멋쟁이 할아버지다.
늘 모자나 장우산 같은 멋스러운 소품을 챙기고 나오신다.
느린 다리에도 자신만의 리듬을 지킨다.
살짝 굽은 허리가 흔들려도 다시 균형을 잡고,
조금 느려지다가도 다시 속도를 붙이며,
늘 같은 곳을 지나가신다.
그 모습은 고요한 음악처럼 마음에 스며든다.
며칠 전에는 병원에서 80대 어르신을 만났다.
검사 접수된 이름을 확인하며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과연 잘 버티실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문을 열고 이름을 부르자,
“네!” 하고 또렷하게 대답하셨다.
단단해 보이는 몸, 맑게 빛나는 눈동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검사가 끝난 뒤 물었다.
“어르신, 어떻게 이렇게 건강하세요?”
그분은 시원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스트레칭하지~ 근데 선생님 너무 예쁘다.
하루 종일 환자들 보느라 힘들 텐데도
이렇게 생글생글 웃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알아?”
힘든 몸으로 오신 어르신이 오히려 나를 칭찬하고 기운을 북돋아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더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아니에요. 어르신이 훨씬 더 예뻐요. 어쩜 이렇게 고우실까? 차트에 나온 나이 본인 나이 맞아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그분은 아이처럼 웃으며
“아, 진짜 기분 좋다~” 하셨다.
우리 둘은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고,
작은 포옹을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어르신들의 꾸준함에서 배운다.
젊음의 힘이 불꽃처럼 눈부시게 타오른다면
어르신들의 힘은 은근한 불씨처럼 오래 지속된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진다.
초콜릿을 강한 불에 녹이면
겉은 금세 타버리지만
중탕으로 천천히 녹이면
오히려 더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낸다.
삶도 그렇다.
우리를 진짜로 변화시키는 건,
거창한 목표나 순간적인 열정이 아니라,
묵묵히 이어가는 작은 걸음이었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은근한 힘을 가진
빛나는 얼굴의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