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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형상을 놓지 못하던 작은 손

무라카미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by NINA

7살 때였나.
집에 손님이 와 계셨고, 엄마는 그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에서 책을 보던 나는 쭈뼛쭈뼛 엄마에게 다가갔다.

아랫집에 놀러 가고 싶어서였다.


아랫집에는 한 살 어린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바비인형이 아주 많았다.
바비의 남자친구 켄인형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정말 갖고 싶던 '인형의 집'도 있었다.


“엄마, 내 아랫집 가서 좀만 놀다 와도 되나?”


우리는 윗집에 세 들어 살았고 아랫집은 주인집이었다.
엄마는 늘 내가 그 집에 가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혹시라도 사고를 칠까 걱정됐던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은 기분이 좋았는지 흔쾌히 허락했다.


“갔다 와라. 00시까지는 꼭 들어와야 된데이!”


신난 나는 현관문을 박차고 다다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동생과 인형놀이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거실에 걸린 벽시계를 계속 확인했다.


'늦으면 안 되는데...'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더 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고 집을 나섰다.
엄마와 약속보다 5분은 일찍 도착했을 거다.

조심히 들어선 나를 보며
엄마는 활짝 웃으며 손님에게 내 칭찬을 했다.


“아이고 니나 좀 봐라. 약속을 기가 막히게 잘 지키지 않나!”


순간 이유 모를 뿌듯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평소 무뚝뚝한 엄마는 웬만해서는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짐했다.
"시간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겠어!"


시간을 잘 지키면 훌륭한 사람이다’
라는 믿음을 머릿속 깊이 새긴 채 말이다.

(사실 그 환한 칭찬을 다시 듣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지키는 나의 강박은 그때부터 수십 년간 계속됐다.

학교를 다닐 때도, 직장인이 된 이후에도
항상 가장 먼저 등교하고, 가장 먼저 출근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과 사무실의 불을 켜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조금 늦는 사람들에게 은근한 우월감도 느꼈다.

'거 좀 일찍 다니지..'

그게 10년, 15년, 20년을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커피 한잔을 들고 문득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내 모습으로 살아온 게 아닐까.'


사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조용한 아침 거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책을 읽으며 내 곁에 다가온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는 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대신
업무 시작 5분 전에 도착하기로 했다.

그 시간만큼 집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내 마음이 내게 조금 더 가까워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지난 시간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왜 나는 나를 그렇게 채찍질했을까.
누군가의 칭찬과 평가에 내 에너지의 대부분을 써버렸을까.

조금 늦어도,
조금 미숙해 보여도,
조금 더 나답게 사는 게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더 좋은 건데.'


아마 나에게 필요했던 건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였을 것이다.

매끈하지 않아도, 느려도,
그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내 속도를 지키는 용기말이다.


얼마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다시 읽었다.

20대엔 책 속 비현실적인 세계가 어렵게만 와닿았는데

마흔이 넘어 읽으니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너도 혹시 타인의 말로 만들어진 형상 속에서 걷고 있지 않니?"


소년 카프카는 타인이 새겨놓은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집을 떠났고

나는 누군가에게 칭찬하는 모습에 맞추려고 나를 계속 밀어붙였다.


카프카도 나도,

진짜 나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흔들리는 형상을 붙잡고 있었던 거다.


다행히 카프카도 용기를 내어 집으로 돌아갔고

나 역시 돌고 돌아 진짜 나를 만나는 중이라는 거.

여전히 비틀거리긴 하지만 말이다.


< 작은 안내 >


이 글은 브런치북 《책한모금의 온기》 시리즈 중 세 번째 글입니다.

조금은 흔들리고 조금은 따뜻한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책 속에서

또 다른 결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유튜브 〈니나의 책 한모금〉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드리는 이야기로 찾아와 주세요


유튜브 〈니나의 책 한모금〉

� 목소리로 듣기

https://youtu.be/tnYYlZCHOzc?si=MddfRSEBweYq_-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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