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이야기
이른 아침,
회사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무거운 비상구 문을 밀고 들어서면
아직 잠에서 덜 깬 몸을 깨우는 차가운 계단의 첫 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운동화 밑창이 계단과 부딪히며 내는 탁. 탁. 탁.
그 규칙적인 소리가 어느새 내 심장 박동과 박자를 맞추고,
아직은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몸을 조금씩 앞으로 밀어붙인다.
한 층을 돌아 올라갈 때마다 작은 창문이 한 번씩 나타난다.
처음엔 깊은 보라색이던 하늘이
점점 주황빛을 띠며 검은 건물 너머로 떠오르고,
이윽고 노란 빛이 스며들어
나의 하루에 작은 불을 하나 켜주는 것만 같다.
그 노란 불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내 등을 부드럽게 밀어주면
나는 그 숨을 그대로 품고 멈추지 않은 채 걸음을 이어간다.
마침내 10층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리고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인사로
내 안의 전투를 단숨에 숨겨버린다.
아무도 모른다.
아직 해도 뜨기 전부터
나는 내 하루를 조금씩, 위로 올려두었다는 걸.
사람들은 대체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로만 누군가를 판단한다.
그의 모습, 성과, 태도.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을 이 자리에 데려온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한 수많은 새벽의 계단일지도 모른다.
문득 넷플릭스 속 김부장이 떠오른다.
대기업에서 25년을 버텨낸 사람.
실수도, 분노도, 자존심의 긁힘도 견디며
다음 날에도 묵묵히 출근했던 사람.
하지만 정장을 벗고 작업복을 입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실패자의 표정을 덧씌웠다.
그의 25년은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가 쌓아온 계단은 누구보다 높았지만
역할이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존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시선.
정말 필요한 건 안타까움이 아니라
조용히 건네는 박수 한 줄이었을 텐데.
"수고했다, 김부장."
이 한마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속 노인도 그랬다.
84일 동안 빈 그물을 끌어올리며
남들이 보기엔 실패처럼 보이는 시간을 견뎌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이 자신을 다시 바다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을.
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거대한 청새치를 잡고도
상어에게 살점이 다 뜯겨나가
뼈만 남은 청새치를 배에 매달고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의 승리는 가치가 없었던 것일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결과는
정말 의미가 없는 것일까.
아니.
그 뼈는 오히려 그가 견뎌낸 모든 날을 똑바로 증명했다.
돌아보면 김부장도, 노인도, 그리고 나도
누구도 단 한 번의 승리로 완성되지 않고,
한 번의 실패로 끝장나지도 않는다.
숨 가쁜 순간들을 지나 아침의 문을 열며 내뱉는 밝고 평범한 인사 한마디에
실은 얼마나 많은 새벽의 전투가 담겨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견뎌온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 힘이니까.
오늘도 잘 해냈다. 우리.
내일도 또 올라보자. 우리.
이 글은 브런치북 《책한모금의 온기》 시리즈 중 네 번째 글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버티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작은 박수를 보내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같은 책(노인과 바다) 속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유튜브〈니나의 책 한모금〉에서 제 목소리로 들려드리고 있어요.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고 싶을 때 편하게 놀러 오세요.
� 유튜브 〈니나의 책 한모금〉
� 목소리로 듣기
https://youtu.be/nQeuOcCLfm0?si=OK47g2CaTsVxOnk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