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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다 찼을 뿐이다

by NINA

병원 직원들에게는 약속된 표시가 있다.

이 환자 예민해요. 조심하세요. 라는 암호.


오늘 그 기호가 잔뜩 붙은 사람이 검사실에 접수됐다.


환자를 호명하기 전에 문을 닫은 채 검사실을 둘러보며

혹시 불편하게 할 부분이 있을지 다시 한번 정돈해본다.


조심스레 불러볼까 하다가

다른 분과 다름없이 대해보자는 생각에

평소처럼 호명했다.


잔뜩 인상을 쓴 한 분이 들어선다.


이 병원은 이게 문제고 저게 문제고

이 검사는 이게 문제고 저게 문제고

오늘 날씨는 덥고 검사실은 춥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쉴새 없이 터져나오는 불만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저걸 다 듣고 있으면 내가 시들어버릴거 같다.


잠시 숨을 고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넘쳐흐르는 이 말들은

어쩌면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쏟아내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누구라도 들어달라고

더더 큰 소리로 울어대며

혼자 외롭게 흘러야했던 감정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마음을 누군가는 안아줘야 하지 않을까.

더 따뜻하게 대해줘야겠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본다.


오늘 너무 덥죠~ 기운없어서 어떡해요~


그쵸~~~ 맞아요!!


내가 한 것은 그것 뿐이었다.


검사를 마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녀는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었을 뿐이다.


흘러넘치는 감정.

우리는 자주 태도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하지만 우리 눈 앞에 보이는 태도가 그 사람의 전부일까.


그들의 모습은 그저

차곡차곡 견딘 감정들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전쟁에 패해 포로로 잡힌 이집트 왕의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딸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노예가 되어 끌려갔고

아들은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아비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 모든 장면을 묵묵히 지켜봤다.


그러다 함께 끌려온 포로들 사이에서

지인 한 명을 발견했다.

그제야 그는 울부짖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모든 감정이 무너졌다.


그를 무너뜨린 마지막 감정.

그것의 크기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쌓이고 쌓인 감정은 어느 순간 버틸 수 없는 무게가 된다.




누군가의 분노가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그들의 견딤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따뜻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저 다 찼을 뿐이다.


그들의 앞에 잠시 멈춰서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기를.


나 역시 분명히

흘러넘칠 사람임을 알기에

따뜻한 손길이 퍼지고 퍼져

나에게도 닿을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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