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아이가 주사기를 꼭 쥐고 말했다.
“선생님 찔러보세요!”
까르르 웃으며 내 팔을 콕콕 찌르던 그 손은,
몇 분 뒤 약을 꿀꺽 삼켰다.
자기도 모르게.
한동안 소아검사실에서 근무했다.
신생아부터 15세 미만의 아이들이 찾아오는 곳.
그중에서도 다섯 살이 채 안 된 아이들이 가장 많았다.
그 나이 아이들은 아직 몸이 여물지 않았다.
힘을 기르지 못한 근육은 약했고,
아래로 흘러야 할 것들이 거꾸로 올라오곤 했다.
식도에서 위장으로 넘어가야 할 음식물은
역류해 자주 토하게 만들었고,
콩팥에서 방광으로 내려가야 할 소변은
다시 거꾸로 올라가 장기를 상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몸 안에서
역류가 얼마나 심한지 확인하는 검사를 했다.
하나는 입을 통해, 다른 하나는 관을 통해.
위장과 방광에 각각 약을 채워야 하는 검사였다.
당연히 아이들에겐 낯설고 두려운 경험이었다.
사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때,
사람은 끝없이 상상하게 된다.
조금만 건드려도
“아악, 아플 것 같아!” 하고 어깨를 움츠리고,
“이 약은 분명 끔찍할 거야” 하며 입에 넣자마자 뱉어낸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마음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일이다.
내가 병원놀이를 자주 활용했다.
바늘을 뺀 주사기를 아이 손에 들려주고
"선생님 여기 찔러보세요~"
내 팔이며 손등을 콕콕 찔러보게 했다.
“어머? 안 아프네? 이거 뭐야?”
“어머! 간지러워~ 이거 뭐야??”
아이들은 어느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입을 앙 다물던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약을 꿀꺽꿀꺽 삼킨다.
그리고는 '어~괜찮네?' 하는 표정을 짓는다.
관을 넣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늘 없어~ 그런 거 아니야~ 아까 봤지이?”
하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장난감을 만지작 거렸다.
끝!
아이고 잘했넹!
아이는 갸우뚱하며 눈을 굴리다
이내 또 웃는다.
성공이다.
사실 나는 문제를 마주하면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최선이라 믿었다.
무게를 견뎌내는 게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해 낸 결과 뒤에는 '불편했다'라는 말이 남았다.
오히려 조금 서툴러 보여도 유연한 방법을 택한 사람들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럴 때면 괜히 억울해졌다.
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책에서 한 문장을 읽었다.
“도끼를 그 뿌리에 갖다 대지 말라.”
강하게 도려내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내가 한 정공법은
어쩌면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통을 줄이는 대신
고통을 있는 그대로 마주 보는 방식.
결국 상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까지 상하게 했다.
그건 꼭 수술 전 항암치료를 먼저 하는 이유와 닮아있다.
암의 크기를 미리 줄이면
수술 범위도 줄어들고
정상조직은 덜 손상되며
몸이 받는 부담도 훨씬 줄어든다.
굳이 큰 고통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흉터는 더 옅게 남기는 편이 낫다.
고통의 크기를 줄이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우리는 모두 집중이라는 초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에 마음을 모으느냐에 따라
그 무게와 깊이는 달라진다.
그저 마음을 모을 곳을 선택하면 된다.
나는 아이의 까르르 웃음소리,
그 행복한 미소를 보며
내가 무게를 더 하고 싶은 곳은
언제나 따뜻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려움은 마음을 쪼그라들게 만들고
따뜻함은 마음이 다가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렇게 나는
고통을 그대로 마주하는 무모함을 조금씩 멈추게 되었다.
모양을 맞추려 얼음을 깎기보다
따뜻한 물로 녹여 채우는 편이
더 온전한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좀 알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