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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보다 먼저 바람을 읽어야 한다.

by NINA

아무리 좋은 무기를 들고 있어도

그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


단지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면

예상치 못한 패배로 좌절감만 쌓인다.


능력과 상황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상황을 읽지 못하는 눈은 뛰어난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아군이 공격할 능력이 있다는 것만 알고
그 공격을 멈춰야 할 때라는 걸
적이 모른다면
승리의 가능성은 반반일 뿐이다.
(손자병법 지형편)


내가 한창 스노보드를 즐기던 시절,
대회에서 늘 1등을 차지하는 선수가 있었다.


그 선수는 이미 많은 사람에게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존재였다.


나는 대회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자주 가던 스키장에서 열리는 경기였기 때문에

가볍게 한 번 출전해보자는 마음으로
그 대회에 참가했다.


익숙한 슬로프 덕분이었을까.

예선 통과에서 멈추지 않고 운 좋게도 결승까지 가서 그녀와 마주하게 되었다.
대회 규정상 예선 성적이 높은 선수가 먼저 코스를 선택하는데

예선 1등이었던 그녀는 당연히 더 유리한 설면을 선택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익숙한 그 선수가 유리한 코스에 서자
나를 크게 의식하지도 않고
그녀의 우승을 당연하게 여겼다.


사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출발선에 서자 묘한 욕심이 생겼다.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집중해보자.


경기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면서

설면은 점점 깊게 파였고
눈 표면은 무르기 시작했다.


예선에서 다른 선수들이 실수해서 넘어진 지점들을 기억했고,
어느 순간 가속을 붙이고
어느 순간 균형을 잡아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봤다.


출발준비신호가 울렸다.


라이더스 레디~


나는 속으로 되뇌였다.

균형.

균형.

오늘의 슬로프는 가속보다 균형에 집중해야 한다.


고!

라는 출발신호와 함께 출발문이 열렸다.


나는 자세를 한껏 낮추고 출발했다.

빠르진 않지만 흔들림 없는 주행.

그날 내게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타이밍이었다.


그녀도 넘어지지 않았고

나도 넘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둘다 위험한 구간을 넘어지지 않고 통과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내게는 살짝 앞선 그녀가 느껴졌다.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이겼다. 라고 생각하고 안심했던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이때다 싶어서

가속을 냈다.

더 세게. 더 세게.


결국 그날의 결승전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윈! 이라는 말을 들은 어리둥절한 나의 표정과

믿을 수 없다라는 듯한 표정의 그녀가

교차되며 화면에 나왔다.


그렇게 늘 1등을 차지하던 그녀 대신
뜻밖의 내가 그 자리에 섰다.


그 날 그 결승전 이후로

나는 한가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능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상대도, 세상도
항상 조금씩 바뀌고 있기 때문에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과거의 전적보다 소중한 것은 지금이며,
그 능력을 제대로 펼치는 시기야말로
진짜 의미 있는 순간이다.


삶도 다르지 않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상황을 알아차리고
흐름에 맞춰 움직일 때
비로소 내 안의 능력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빛은,
어쩌면 나조차도 몰랐던 나를
조용히 드러내 보여주곤 다.


상황을 읽지 못한 능력은
허공에 휘두르는 칼과 같다.

칼을 휘두르려면,
칼보다 먼저 바람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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