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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보다 완성, 지금을 살아내는 힘

by NINA

한 아기를 찍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작은 판을 챙겨 향한 곳은

병동이 아닌 병리과 였다.


이동형 엑스레이 장비를 끌고 도착한 나를 보더니

병리과 선생님이 복도 끝으로 안내해주신다.


그리고 이내 예쁘고 차가운 박스를 하나 가지고 나오셨다.


나는 그 박스안에 무엇이 담긴 지 몰라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되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얌전히 누운,

이미 떠나고 남은 아이의 차가운 몸이 있었다.


내 손바닥 보다 겨우 조금 커 보이는 아주 작은 아이였다.

그 작고 차가운 몸에는 예쁜 배내옷이 정성스레 입혀져있었다.


병리과 선생님은 그 아이의 몸에서 조심스레 그 옷을 벗겨내고

나는 검사할 판에 그 아이의 약한 피부가 상할까 얇은 부직포 천으로 감쌌다.


이미 굳어버린 작은 몸에서 옷을 벗겨내는 건 쉽지 않아보였다.

꽤나 오랜시간 동안 조심스레 아이를 만지는 선생님이 고생스러워보여

나도 모르게 이런말을 했다.


"에구~왜 애한테 이런 옷을 입혀나서~그쵸."


선생님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입혀주고 싶었던거죠. 엄마아빠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바비인형같이 아주 작은 몸으로 태어나버린 아기는

부모의 품에 안기기는 너무 약해보였다.


어쩌면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좁은 인큐베이터 안에 누운채

그 연약한 몸에 온갖바늘이며 호수를 밀어넣으며

세상과 마주해보려 애를 썼을지도 모른다.


부모는

그런 아이에게 고운 옷 한벌이라도 입혀보내주고 싶지 않았을까.

당연한 마음이 아닌가.


귀하고 소중하고 연약하고 아픈 그 마음을.

나는 너무 쉬운 말로

지워버렸다.




벌써 20년 전 이야기다.


당시 입사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앳된 방사선사였던 나는

속으로는 긴장해서 땀이 줄줄 흘렀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건 별거 아니야.' 라는 태도를 흉내내며

뻣뻣하게 굴고 있었다.


신입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그 마음,

지금 돌아보면 그게 오히려 가장 미숙한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완벽할 수 없음에도

완벽을 흉내내는 사람.

그게 나였다.


그렇게도 어리석었던 나는

눈 앞의 결승점만 좇다가

수없이도 많은 마음을 놓쳤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안다.


완벽을 추구한 나의 태도는

사실,

과정을 무시하는 태도였다는 것을.


하루하루 사람을 마주하고

그 순간에 진심을 다해 임하다 보면

그 날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런 하루들이 모이고 또 모여

어느새 삶을 조금씩 완성해 가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그래.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완벽이 아니라 완성이었다.


삐걱대고 괜찮고

미숙해도 괜찮고

그저 한걸음에 진심을 다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완성이 있을까 싶다.


완성으로 향하는 길은 진심을 다한 과정만이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형병지승, 비기이승야(形兵之勝, 非奇勝也)
병사의 승리는, 기묘한 전술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손자병법(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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