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통합민원(주민등록, 전입, 인감, 가족관계증명) 3. 세무, 민방위 4. 산업 5. 산업 6. 기초생활보장 7. 한부모, 아동, 노인 8. 장애인, 바우처 9. 정부양곡, 사회복지증명서
다소 침침한 느낌의 실내에 일렬로 늘어선 책상 위에 안내 푯말이 달려있다. 이런 날 항상 어색하다. 이 사무실에서 누가 떠나가는지 누가 남아있게 될지 모르고 본인 자리가 어디일지 알지 못하는 채로 사무실에 들어선다. 모두가 자기의 위치와 임무가 있는 곳에서 지연 혼자 우두커니 있는 건 참 곤욕스럽다. 모두가 가는 곳을 알고 바삐 서두르고 있는데 혼자 길을 몰라 발을 내딛지 못하는 심정을 닮았다. 모두가 속을 털어놓을 베프가 있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줄 살뜰한 배우자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무도 없는 지연의 쓸쓸함을 닮아있다. 그래서 이런 날 지연은 소외감으로 점철된 인생 컷들이 스멀스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피할 수 없다. 수학여행 가던 버스 안의 텅 빈 옆자리, 도서관에서 보낸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어젯밤 넘어지셨다는 소식에 걱정돼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엄마는 언제나처럼 통화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한 둘이 아니라 모두와 이렇게 연결이 안 된다는 건 어느 특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연 자신의 문제인 게 아닐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어디서부터 문제인 걸까. 결혼한 남동생과 통화해 본 지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자라면서 특별히 싸웠던 것도 아니고 뭔가 사이가 벌어질 만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자매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위로도 주고받고 수다도 함께 떠는 그런 사이가 되었을까.
발령받은 첫날 시청에 모여 발령장을 받고 누군가의 차로 발령지로 이동해 사무실에 들어선 때의 어색함이 고스란히 지연의 세포 안에 남아있다. 그건 새 학년마다 새 교실에 들어서서 낯선 이들에 둘러싸이던 날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새 학년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나만 못난 건 아니구나.' 지연은 조금은 안도했었다. 전년도 학급에서 별달리 좋았던 추억도 없고 친구도 없었는데 왜 그곳을 벗어나는 게 두려웠던 걸까. 그 점이 오랫동안 궁금점으로 남았었다. 더한 경우가 다음 연도 새 교실에서 닥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을까. 사무실에서는 모두 자기 일에 열심인 듯 하지만 모두 지연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날의 시선을 오늘 다시금 느끼고 있다. 모두 메신저로 지연에 대한 총평을 하고 이전 근무지에 있는 부서원들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정보를 나누느라 분주하다. 민원대 뒷자리에 총무를 찾아 인사발령받고 인사드리러 왔다고 하니 동장님은 말씀 중이시라고 한다. 예상한 대로다. 미리 전화를 드리고 시간 약속을 잡고 왔지만 갑작스러운 민원인의 방문은 늘 일어난다.
어색함 속에서 덩그러니 큰 탁자 앞에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민원인들이 대기하는 삼 인석 철제 벤치 4개가 놓인 곳을 바라보며 9번까지의 민원대가 배치되어 있다. 책상에는 모두 초록색 부직포 위에 유리가 깔려있다. 1번 창구 옆에는 1층 화장실로 향하는 문이 있고 9번 창구 옆자리는 동대 사무실로 향하는 출입문이 있다. 1번 창구 뒷자리에 있는 6인석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안 잠시 자리를 비웠던 행정 팀장님이 돌아오시고는 자리를 잡는다. 키가 작고 각진 금테 안경을 쓴 꼼꼼한 인상의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이다. 인사발령이 나고 나면 발령지의 직원들만 발령자의 상황을 점검하는 건 아니다. 발령자 역시 발령지의 모든 직원을 다 수소문해 보고 그곳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알아보고는 한다. 하지만 지연은 그런 사전 준비 없이 오늘 이 자리에 왔다. 알아본들 그들을 바꿀 수도 없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가 바뀔 수도 없다. 그 자리를 피할 수도 없고 피한다 한들 달리 갈 곳도 없다. 또 간다 한들 그곳은 괜찮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덩그러니 기다리는 것도 곤욕이지만 이런 시간도 정말 진땀이 난다. 지연에 대해 이미 건너 건너 많은 것을 들었을 테지만 다시금 탐색을 이어간다. 그 이후에는 또 아는 이들과 지연에 대한 평가를 하느라 메신저가 꽉 찰 것이다. 다들 지기 의견을 얘기하고 건너 들은 이야기를 보태고 하면서 서로서로 자신의 정보력을 과시하고 있을 거다. "안녕하세요, 강지연 주사님이시군요. 전에 동은 근무하셨고요?" "네, 행자동에 있었어요." "민원 창구에 계셨던 거죠? 무슨 업무 보셨나요?" "세무와 주민전산 했었어요." "네. 행자동에는 그럼 얼아나 계셨던 거예요?" "일 년 있었어요." "그럼 뭐 민원창구는 문제없으시겠네요." 이렇게 나의 자리가 거의 정해지는 중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1,2,3 중의 하나가 나의 자리가 될 것이다. 이변이 있다면 4,5번 산업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일반 행정직은 업무 범위가 넓어서 민원대 뒷자리에 있는 총무와 시민불편, 재난까지도 가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가 발령 난 곳에 남게 되는 직원, 발령받아 오는 직원들의 직급과 경력을 보며 내가 들어갈 자리를 미리 알아보곤 하는 것이다. 같은 자리여도 동에 따라 좀 더 유리하거나 더 힘들거나 하는 변수도 알아봐야 한다. 건축 직렬이나 방재안전 직렬, 환경 직렬 같은 소수직렬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늘 느끼지만 현실엔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제 인사이동 후 남게 되는 이들과 이번에 발령받은 이들의 모든 정보를 고려하고 동장님과 팀장님의 취향에 따라 업무분장이 정해질 것이다.
"여기는 뮈 시골 동네가 많아서 민원인들이 순박하고 소탈해요. 토지는 당주시내 동 중에서 제일 넓지만 인구가 적어서 뭐 동도 작고. 민원인도 별반 없어서 일하시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 "과연 그럴까. 민원인의 많고 적음은 사실 동내 인구수로 결정되는 건 아닌 거 같다. 사실 나도 일평생 주민센터 가볼 일이 없었다. 인터넷이 우리나라처럼 발달되어 있고 웬만한 분야는 다 전산화 작업이 완료됐기 때문에 필요한 서류 대부분은 인터넷 발급이 가능하다. 굳이 주민센터를 방문하는 번거로움을 누가 자초할까. 사람들이 찾지 않는 주민센터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정말 말 그대로 철밥통을 철통같이 지키고 세금이나 축내면서 하릴없이 월급만 받아가고 있는 걸까. 마흔이 넘도록 일반인으로 지내왔고 가족 중에 또는 직접적으로 아는 이들 중에 공무원이 없었던 지연은 공무원의 하는 일이 무엇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네에, 그럼 연세 드신 분들이 꽤 많겠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농촌지역은 고령화가 심하니까." 농촌의 고령자는 도시 젊은 인구의 몇 배의 품이 든다. 젊은 인구는 대부분 인터넷을 이용하니까 주민센터 방문부터가 안 일어나고 오더라도 일이 척척 진행된다. 반면에 고령자는 특히 농촌의 고령자는 일일이 주민센터 방문이 기본이다. 게다가 신청서 쓰는 일, 본인들이 처리하려는 업무가 무엇인지 전달하는 일부터가 시간을 잡아먹는다. 생각만으로도 진이 빠질 노릇이다. "다들 서로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라 모두 점잖고 뜨내기 많은 동처럼 막가는 사람들은 없어요." "네, 정말 다행이네요." 이건 늘 의례적으로 하는 멘트이긴 하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새로 온 직원을 안심시키려는 배려일 수도 있고 또는 민원인 응대에 겪는 어려음을 경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 지연은 전자라고 믿고 싶다. 또는 배려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거라고 왠지 막연히 믿고 싶다. 그렇게 평화롭고 동화처럼 무탈한 하루하루가 이어지면 참 좋겠다. 왠지 그러면 모든 인간관계도 순조롭게 해결될 것만 같다.
"손님 가셔서 지금 동장님 시간 되세요." 총무의 말에 팀장님과 함께 동장실로 들어선다. 자개로 된 커다란 원지동장 명판이 놓인 커다란 책상이 출입문 왼쪽 끝에 놓여있고 그 앞에는 범상치 않은 조각들이 가득한 꽤 커다란 회의 테이블이 놓여있다. 그러고 보니 책상에도 묵직한 조각들이 가득하다. 이건 국장님 실도 아니고 동장실에서는 좀 보기 어려운 경우이다. 테이블 오른쪽 벽에 놓인 온장고에는 여러 종류의 드링크제가 보이고 그 옆의 커피 포트에는 검은빛에 가까운 진한 갈색 음료가 가득한 유리 용기가 올려져 있다. 키가 크고 살집이 전혀 없는 호리호리한 중년의 남자가 책상 너머 의자에서 일어난다. 두껍게 문신한 눈썹에 피부 메이크업을 하고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다. 동네 뒷산 가는 길에 흔히 볼 수 있는 복장의 동장님들이 통상적인데 이 분은 본인관리에 진심이신 분 같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동장님은 테이블 대신 커피포트 앞으로 가서 종이컵에 음료를 따라 테이블 위에 놓아준다. 향이 뭔가 한약스러운 커피라기에는 진한 무엇이다. "이거 드세요. 십전대보탕이에요." "따똣해서 너무 좋네요." "제가 만들어요. 여기 주민센터에서." "이걸 직접 만드셨어요?" 주민센터에서 십전대보탕을 끓이는 동장님이라니 참 흔치 않은 그림일 거 같다. 첫인상에서 우리는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쓴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무난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울한 나를 깊숙이 감춘다. 그리고는 상대의 말에 잘 호응하는 밝은 표정을 장착한다. "전에 행자동에서 일 년 동안 주민전산하고 세무 담당하셨대요." 팀장님이 나에 대한 브리핑을 한다. "우리 동이야 뭐 작은 동이고 민원인들도 다들 동네사람들이라 별 어려움은 없으실 거예요." "다행이네요. 팀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따뜻하고 달큰한 십전대보탕이 추운 적도 없었던 몸을 녹여주는 것 같다. 이곳 원지동도 어쩌면 예기치 못한 따스함을 나에게 전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