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에서 역할분담보다 중요한 서열정리
"너의 뜻에 무조건 따를게, 네가 무얼 하든 난 다 좋아"
듣기만 해도 속이 편안해지는 문장이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일하면서 몇 안 되는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배우자도, 부모님도 아닌 동업자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문장을 뜯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함께 하는 동업에서 상대방의 뜻대로만 하게 해주는 것.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가능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 그저 이 동업에서 프리라이더가 되고 싶은 쪽이거나, 두 번째, 내가 상대 동업자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상대가 무얼 하든 나 만큼 그 일을 잘할 수 없다(=결국 내 도움이 필요하다)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위 문장은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대표님들이 직원인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의도는 모두 후자에 속하는 경우였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저 문장은 반어법이란 것이다.
첫 번째 의미에 대해서는 전 챕터에서 살펴보았으니, 나는 이 후자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확장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직장생활일 때야 대표가 직원보다 우위에 있는 관계가 맞으니 위선적인 대표라는 욕만 먹을 뿐, 사실상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등한 입장의 동업관계에서 상대방을 모두 다 받아주겠다는 식의 제스처가 반복된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나보다 아는 것이 더 많다 생각하여 아량을 베푸는 태도이니 이 적신호를 잘 분별해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동업은 누가 누구 위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회사를 경영하는 전제조건을 내포한 개념의 사업구조이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서열에 대해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당연히 두 사람이 동업관계를 맺고 일을 할 때에는 실력이나 속도 면에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있다. 누군가가 상대방에 비해 업무 속도가 월등히 빠르고 부지런하다면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이 느리고 게을러 보이기도 한다. 유능한 역량을 가졌다는 전제 하에 조금 더 속도감이 있고 성실한 사람이 특정 업무나 사안에 대한 업무처리 및 의사결정 등이 신속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패턴이 고착화될 시, 더 부지런한 사람이 상대 동업자를 리드하는 구조로 가게 된다. 리드를 당하는 것에 대한 상대방의 불만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고, 이는 자연스러운 서열이 생겨남과 동시에 동업에서의 본격적인 균열이 시작되는 과정이기에 매우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동업을 할 때에는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각자의 서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동업 시, 서열을 정리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면 된다. 공동의 업무에 대해서는 함께 의사결정하며 협력해 나가더라도 각자 업무를 하는 방식이나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보니 각종 의견 충돌과 갈등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각자 맡은 일을 정하여 역할을 극명하게 나눠두는 것이 안전하다. 될 수 있다면 아주 미세한 영역부터 공동으로 수행해야 하는 업무까지 동업 초기에는 세밀하게 업무 분담을 해두는 것이 서로 간의 롤을 이해하고 각자의 바운더리 내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 하기 좋은 구조가 되는 것이다. 해당 업무의 책임자가 본인이다 보니 업무를 게을리하거나 대충 하기 어려운 구조로 만드는 것이고, 사고나 실수가 발생했을 때는 상대 동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으니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함을 동의할 수밖에 없어진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경우는 제대로 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처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주고 싶다는 명목으로 내 뜻에 따르겠다고 하며 업무 분담을 잘 피해 갔다. 물론 어느 정도의 역할 분담을 했지만 굉장히 모호했고, 분담한 역할마저도 그녀가 수행하지 못하자, 그 경계는 더욱 무너졌다. 급기야 그녀의 잦은 실수와 업무 지연 등으로 직원들이 방치되는 사태가 늘어났고, 제대로 된 디렉션조차 부재하자 직원들은 대놓고 내게 불만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잦은 실수와 느린 업무 처리 속도, 안일한 방식의 회사 매니징이 안겨다 준 대참사였다. 결국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그녀의 업무까지 대부분 나를 거쳐갔고 모든 사안에 대한 결재를 내가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보기 좋은 아량을 베풀며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겠다는 그녀의 단언과 약속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나보다 업력이 더 길었다곤 하지만, 그저 나이만 더 많이 먹었을 뿐이고, 그녀가 이런저런 일들을 과거에 해왔다곤 하지만 단발적인 입사와 퇴사의 반복으로 그녀의 프로페셔널리즘은 그 어느 분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나니 그녀는 입을 다물어버리며, 프로젝트 더 나아가 회사 전체에서 도태되기 시작했다. 운이 좋지 않아 자신의 기량이 떨어지는 일은 왕왕 발생할 수 있다. 일을 모두 잘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조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업을 시작한 직후부터 보여주었던 그녀의 실력이나 역량만으로 그녀를 판단하지 않으려 애썼다. 많이 답답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그녀의 구멍을 메꾸어서라도 좋은 퍼포먼스를 유지하려 했고, 회사의 첫 프로젝트인 만큼 그녀를 끌어주며 외부적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려 노력했다.
그래도 무조건적으로 나를 따르겠다는 그녀의 말이 고마워서라도 업무선상에서 배제된 그녀가 애잔하게 느껴져 어떻게든 하드캐리해보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진심은 들통이 나버렸다.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던 그녀가 어느 날 이성을 잃고 나를 불러 이야기했다.
'네가 우리 회사의 이사를 하는 게 어때?'
자신의 밑에서 일하라는 뜬금없는 발언에 적잖게 당황했지만 미련한 나는 그때도 동업의 균열이 곧 회사의 균열이라고 생각해 더 큰 재앙을 막아보고자 그 말을 듣고도 그녀를 타이르기만 했다. 다행히도 넙죽거리며 사과를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그 말은 금세 없던 말이 되긴 했지만, 내 가슴속에는 평생 남는 말이 되어버렸다. 회사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어왔던 십수 년간 쌓아온 그녀에 대한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때는 당장 해야 하는 일들에 치여 그녀와 갈등을 키우는 것이 사치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자존심이고 잘잘못이고 따지지 않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인데, 그녀에게는 이러한 나의 제스처가 본인 멋대로 정해둔 우리의 서열을 다시금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