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4. 문 앞에 자존심

Check Your Ego at the Door

by yunyuri

회사 설립과 동시에 프로젝트를 개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와 그녀, 아니 나는, 아무것도 없는 회사 공간에 겨우 냉장고와 테이블을 하나씩 구비해 두고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집기를 들이는 등 인테리어에 신경 쓸 시간은 아예 없었고, 제대로 된 회사 명판 하나 붙일 여유도 없었다. 처음에는 의자 수도 모자란데 명판이 무슨 대수겠느냐 생각했지만 엉뚱한 곳에 택배들이 쌓이자, 명판 비슷한 것이라도 구비해야겠다 싶었다. 급한 대로 동업자 ‘그녀’는 우리만의 힙한 콘셉트를 보여 주자며 명판 대신 종이에 ‘Check Your Ego at the Door(자존심은 문 앞에 두고 오라)'라는 문구를 써서 문 앞에 달자고 했다.


대표이긴 하나 나이로는 가장 막내였던 나로서 전혀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단지 허세스럽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이유는 위 영문 문구가 1985년 1월, 음악계의 초대형 스타들이 모여 ‘위 아 더 월드’를 녹음하는 역사적인 프로젝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의 한 장면에 나오는 문장이라는 점에서다. 팝의 전설 퀸시 존스 프로듀서가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앞서 참여하는 모든 대스타들은 자존심을 문 앞에 두고 오라는 의미에서 위 문장을 적어 녹음실 앞에 붙였다는 것에서 비롯된 명언인데…. 그걸 굳이 우리 오피스 현관에 해두자는 제안이 너무 대놓고 힙한 척이라 더 트렌디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 어떠한 부분에서도 좋은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던 그녀이기에 이것마저 반대하면 오해를 살까 싶어 동의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우리 회사 명판의 최대 피해자이자 흑역사 제조기는 그 누구보다 자존심을 현관 앞에 버리지 못한 그녀였으니 말이다. 회사 공간에서만큼은 모든 계급장을 떼고 편견 없이 일하자는 모토를 가진 우리 회사가 지상 최악의 동업 갈등을 맞이하였으니 역시 사람은 항시 말조심을 해야 한다.




그녀의 업무 실수들이 남발하는 와중에도 프로젝트는 계속되어야만 했다. 백 명 이상의 프리랜서 인원들이 대동된 대형 프로젝트이니만큼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나는 매일이 예민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표가 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두 명이나 있는데 한 사람이 두 사람 몫을 다 하면서도 동일한 페이를 받고 이름을 똑같이 올린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하는 인간적인 속마음이 슬슬 고개를 내밀던 찰나였다. 계속 이렇게 가다간 우리 사이가 틀어질 수 있겠다 싶어 그녀 밑에서 일할 사람을 뽑자고 제안했고, 그녀를 보완해 줄 수 있는 베테랑으로 뽑았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함께 전했다.


그녀는 호기롭게 알겠다곤 했지만 머지않아 그녀가 추천해 준 인물들의 백그라운드를 체크해 보았을 때 그들의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뽑아 자기가 지금껏 실수한 것들을 책임지고 만회해 보겠다고까지 하니 그 의지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었다. 동업이란 이러한 것이다. 동업자가 아니라면 칼같이 내 결정으로만 밀고 나갈 텐데, 아쉬운 선택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때론 강 건너 불구경해야 하는 것이 동업의 치명적 단점 중 하나이다. 상대방의 무능함을 맘 편히 욕하고 무시하며 내 갈 길로만 갈 수 없는 것이 공동대표자의 숙명인 법.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간신히 희망회로를 돌려보며 그녀가 뽑은 새로운 사람들이 그녀와 부디 잘 맞는 합을 이루길 빌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쯤 되면 결말은 다들 알겠지만, 그들 역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녀를 보완해주지 못한 것은 물론, 그냥 무능했다고 쉽게 표현할 수 있겠다. 고작 백 명중에 딱 두 명만 그녀의 선택으로 뽑았는데, 그 두 명이 하필 한 명은 일머리가 없고, 다른 한 명은 업무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앞으로 편의상 일머리 없는 인간을 A, 인성에 문제 있는 인간을 B라고 부르겠다). 그나마 A는 어찌어찌 일러주면 액션을 취해서라도 애써 부족함을 메꾸려 했지만, B는 나이가 많고 해당 보직에 대한 경험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나이 어린 여자 대표들이라고 밥 먹듯 나와 그녀까지 무시를 일삼았고, 업무를 지시하면 그 일은 당장 할 필요가 없다며, 하지 않아도 되는 99가지의 이유를 대느라 하루 종일을 낭비하다가 오후 6시 땡 하면 퇴근하는 인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A는 백 명에 달하는 프로젝트 피고용인들에 대한 계약서를 나와 나누어 작성하고 검토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기본적인 일자나 금액조차 틀려 결국 몇 백만 원을 더 들여 계약서 업무만을 담당해 줄 인원을 추가로 뽑았다. 이렇듯 무능하다는 것은 마음만 상하는 일이 아니라, 화사 입장에서 돈이 새어나가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일을 못해내더라도 무능한 동업인과 그녀가 뽑은 무능한 두 명의 급여는 꼬박꼬박 지급되지만, 그들이 못하고 안 하는 일은 결국 보란 듯이 나의 몫이 되어 업무의 하중만 늘어났다.




잔소리를 하기도 벅차던 어느 날, 결국 사달이 났다. 프로젝트 계획을 논의하는 회의 첫날, B는 중요한 가족행사가 있다며 빠졌다. 나는 동업인 그녀에게 B가 복귀하면 첫째 날 회의록을 참고해서 일주일간의 회의가 모두 끝나면 스케줄을 일괄 정리해서 모든 프리랜서 작업자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당부를 해두었다. 일주일 동안의 회의 끝에 약속대로 회의록들을 정리해서 작업자들에게 전달하기로 한 날, 돌연 B는 그 일을 본인이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그녀와 내가 있는 방까지 쳐들어와 따지고 들었다. 해당 업무는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며 노발대발하는 그를 앞에 두고 살짝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간신히 정신줄을 붙들고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왜 그 일을 자신이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발뺌했고, 나는 삼진아웃을 당해버리고 말았다. 뚜껑이 제대로 열렸지만, 그럼에도 불필요한 분쟁을 조장하지 않고자 내가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짧게 답했다. 누가 들어도 친절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불쾌한 대화를 종결할 최선의 방법이었다.


소름 돋는 사실은 그 비상식적인 언쟁이 오고 가던 같은 공간에 동업인 '그녀'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당부했던 일을 B가 특별한 이유 없이 하지 않겠다며 따지고 들 때부터 그 방을 나서기까지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B가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유독 무례했고 비상식적으로 굴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B와 업무를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생각의 검열이 필요했다. 그 긴 시간 동안에도 그녀는 일언반구 없었고, 마치 방청객 마냥 앉아있는 모양새가 기가 막혔다. 이 상황에 대한 어떠한 문제의식도 못 느끼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해결하겠다며 대화를 빠르게 끝내려고만 했다.


해결?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그녀가 지금 나에게 말한다.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언어능력을 완벽히 상실한 나는 회사 공간에서 벗어나 카페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앉은자리에서 두 시간을 내리 오열을 했다. 어떠한 이별에도, PTSD 가득한 직장에서도 목 놓아 울어본 적이 없는 내가, 옆에 손님이 가득한 카페에서 어린 얘처럼 엉엉 울어버린 것이다. 몇 달치 밀린 각종 스트레스, 화, 짜증, 억울함, 피곤함을 그 울음으로 씻어내고 난 뒤에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그녀를 카페로 불렀다. 그리고는 동업 이래로, 아니 그녀와 관계를 맺은 이래 처음으로 그녀에게 우리의 처참한 현주소에 대해 가감 없이 직선적으로 말했다. 내가 말을 하는 내내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그저 묘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당연히 대단한 해결책을 그녀에게 바라지 않았다. 우리 동업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까지 왔는지 서로 자각하고 털어놓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B가 화나게 한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 외에 우리에게는 백만 가지의 다른 문제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일은 그저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열정적으로 토로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무엇이든 도울테니 못하겠으면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는 나의 말에도 그녀는 나를 더 수렁에 빠뜨릴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나의 적극적인 자세와 열정에서 비롯된 현 상황의 아쉬운 마음을 악용하려 한 것이다. 그 상황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아쉬운 입장'에 서 있는 나를 약자로 만들어 나에게 이관된 권한을 다시금 자신에게 주어야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며, 자신이 이 모든 문제의 key가 된 듯 굴었다. 모든 문제점의 근원인 그녀가 이 사건을 해결할 가장 중요한 key맨이 되는 아이러니.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을 약점 잡아 권력을 되찾고자 한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회사의 공동 대표로서도, 동업인으로서도 다시금 그녀의 무능함을 확인하게 된 사건이었다. 문제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던 그녀, 그저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하면 본인이 그럴듯한 위치에 서서 사람들을 부리며 체면을 세울 수 있을까가 그녀의 주 관심사였을 뿐이다. 실력이 아닌 생떼로 잃어버린 리더의 자리만 꿰차기에 급급한 그녀의 지독한 이기심은 우리의 동업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 가장 극명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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