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6.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대가리 꿇어

by yunyuri

인어공주도 삼일 만에 목소리를 되찾아 해피엔딩을 맞이하는데, 그녀와 나 사이에는 무려 30일 넘도록 묵언수행이 지속되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과 약속한 유예기간 한 달이 지나던 시점에 그녀와 동반 참석해야 하는 외부 회의가 있어 회의 후 근처 카페에서 대화 나누자는 메신저를 보냈다. 그 마저도 답이 없던 그녀였지만 회의 후 나는 그녀에게 카페로 가자고 다시 한번 이야기했고 우리는 드디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나에게 마음이 상해서, 혹은 본인이 정리해야 할 생각들이 남아있어서 등 '우리'라는 이유로 고민이 길어질 수 있겠노라 생각했다. 단기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감정의 골은 충분히 깊어졌고 오해가 쌓였으니 이 기회에 서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간을 잘 기다리던 내가 먼저 대화를 시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계기가 있었다. 그녀의 온갖 비위를 다 맞추던 것이 지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먼저는 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나를 말없이 지켜보던 절친한 친구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참고로 그도 동업인 '그녀'와 함께 같은 팀에서 일을 하고 나보다도 먼저 그녀를 알았던 사람이며 그 이후로 쭉 가까이 지냈던 사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너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거 네가 먼저 대가리 꿇으란 거야.'


대가리를 꿇어? 평생을 험한 말 한 번 입에 담지 않던 친구가 마저 말을 이어갔다. 자신도 함께 프로젝트하던 당시에 그녀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날 이후로 자신의 인사도 받지 않고 무표정과 무응답으로 일관했던 사건이 있었더랬다.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상사였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 간신히 풀었다며, 결국 먼저 손 내밀지 않으면 그녀는 그 어떠한 제스처도 먼저 취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는 그녀와 나 사이에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카페에서 한 달 만에 마주하게 된 그녀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입 밖으로 한 단어를 뱉기까지 너무 많은 고민이 되었지만 그녀가 이토록 묵언수행을 하는 이유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무너져버린 그녀의 자존심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추켜세워주는 방법은 아래의 magic word 밖에 없었다.


'미안해'


사실 뭐가 미안한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겠다. 프로젝트 내내 실수연발을 하는 바람에 본인의 입지가 자연스레 좁아지며 사람들 사이에 부정적 평판을 피해 갈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그녀의 업무 대부분을 이관받아 의사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최소한의 배려를 위해 그녀와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상의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가 전부 다 아니꼬웠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먼저 나를 상대로 등을 돌리며 대화를 거부하기로 선택한 것인데, 오히려 본인이 피해자처럼 있으니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따지고 들자면, 그녀보다 몇 배의 불만을 제기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저 먼저 내려놓고 화해를 취하는 화해의 방향성을 선택한 것뿐이다. 누군가는 해결하지 않으면 현 상황에서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미안하단 말을 꺼내자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이내 그녀의 대답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네가 얼마나 속앓이를 할지 나는 다 알고 있었어. 너는 누구보다 이런 상황을 힘들어하는 사람이니까'


예상대로 그녀는 내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일부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골라서 했던 것이다. 괘씸하긴 했지만, 기왕 이렇게까지 왔으니 그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설사 서로 상처받는 한이 있더라도 허심탄회한 대화를 끝으로 우리 동업의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고, 나의 대가리를 꿇은: 사과의 제스처가 마치 자신의 전략대로 되기라도 한 듯, 나에 대한 비난을 일삼으며 기를 죽이려는 파워플레이(power play)만을 시도했다.




그녀는 그렇게 목적성 비난만을 나에게 뿜어대기 바빴는데, 너무 많아서 전부 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 계약서를 왜 그렇게 세밀하게 보냐, 원래 일이란 건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 네가 너무 철두철미해서 사람들이 피곤해하고, 너를 욕하며 싫어한다

-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나 본데 그런 식으로 일하면 나중에 사람들이 너와 일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것들인 건 알지만 일을 하다 보면 힘드니 하루 이틀 더 걸릴 수도 있는 것이다

등등...


그녀가 내뱉은 수많은 말들은 대부분 감정에 호소하는 말과 명확한 근거가 뒷받침된 의견들이 아니었다. 주로 남들이 어떻게 볼지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는 눈치였고, 자신이 일을 못해 내가 처리하거나 진두지휘했던 부분이 꽤나 민망했었나 보다 싶었다. 아직도 그녀는 우리가 한 회사의 공동대표로서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여행이나 같이 다니던 친구 관계인지 명확한 관계정립 및 공과 사 구분이 안 되는 눈치였다.


그녀처럼 감정에만 호소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의 말들을 수렴해서 행동한다 해도 문제이다:

- 믿음을 갖고 계약서를 적정 선까지 썼는데, 누군가가 그걸 악용하거나 불의의 사유로 계약을 물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 느슨하게 굴어서 프로젝트에 사고와 구멍들이 발생한다면?

- 타이트한 프로젝트인데 마감을 하루씩 늘려 편하게 가다가 중간에 사고나 예기치 못한 건으로 지연이 더 길게 발생하여 마감 기한 내에 납품을 하지 못한다면?




그녀의 이러한 말들은 아무 고민 없이도 바로 반박이 가능할 정도로 허점이 가득하다.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주장에 수반되는 적절한 솔루션이 뒷받침될 때에 그것이 채택 가능한 의견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그녀의 말들에 크게 휘둘리진 않았지만 오히려 알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밑바닥을 더 알게 된 느낌이라 더 최악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날 우리는 총 12시간, 그러니까 아침 8시까지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11시간 동안은 그녀가 나를 상대로 비난을 쏟아내는 시간들이었고, 급기야 기세가 등등해진 그녀는 점차 본색을 드러내며 본인은 본인 멋대로 일하고 싶은데, 매번 너와 상의해야 하는 것이 싫다, 자기 맘대로 권한을 갖고 일하고 싶으니 네가 회사의 이사 직으로 내려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스스럼없이 지르고야 말았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해명도, 사과도, 답변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지껄이고 싶은 대로 지껄이는 느낌이라 어떤 게 팩트인지 픽션인지 알기 어려웠고, 어린아이 투정에 가까운 말들이라 성숙한 대화로 어른스럽게 풀어가기엔 그녀 마음속엔 일곱 살짜리 아이만 살고 있을 뿐이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대화를 나누는 시간 내내 매우 슬펐다. 십몇 년간을 의지하며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겨우 이 정도 사람임을 알게 되며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왔던 우리만의 세계관이 완벽히 무너져 내려 그 폐허 한가운데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말로는 미안하다고 잘해보자고 했지만 희망은 전부 사라졌고 우리의 시대는 시작도 못하고 그렇게 끝나버렸다.

keyword
이전 05화CHAPTER 05. 쉐도우복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