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의 회의실은 늘 차갑고 정돈된 분위기였다. 하얀 형광등 아래, 차가운 금속 책상 위에는 사건 자료와 분석 리포트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벽 한가운데엔 대형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었고, 그 위에는 복잡한 데이터 흐름도와 연결 선이 얽혀 있었다. 그 중심에는 두 개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민준’과 ‘서윤’.
이준호는 보드 앞에 서서 두 이름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는 무심한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지만,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형사로서의 직업적 본능이 그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질문을 던졌다.
누가 더 위험한가? 누가 더 정의에 가까운가? 아니, 애초에 이 둘은 정의의 편에 서 있는가?
그 순간, 문이 조용히 열리며 민석이 들어왔다. 민석은 경찰청 내에서 활동하는 화이트해커로, 언제나 깔끔한 셔츠에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인물이었다.
"형, 이 사건… 평범한 사이버 범죄가 아니야."
민석은 노트북을 펼쳐 데이터 흐름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민준과 서윤이 남긴 해킹 패턴들이 복잡한 그래프로 나타나 있었다. 패턴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미묘한 교차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준호의 눈이 그 지점을 가만히 응시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민석이 조용히 물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주먹을 쥐었다. 선택은 곧 책임이었다.
폐공장은 삭막했다. 낡은 철문은 녹슬어 있었고, 바닥에는 부서진 유리 조각과 먼지가 가득했다. 천장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고여 차가운 기운을 더했다. 이준호는 민석과 함께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안에는 노트북 화면의 푸른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서윤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후드티를 걸친 채, 노트북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얼굴은 차갑고 담담했다. 이준호가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 이렇게 쉽게 찾아올 줄은 몰랐네."
서윤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어딘가 날카로웠다. 이준호는 총 대신 냉철한 시선을 그녀에게 겨눴다.
"넌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서윤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무례하기보다는 자신감에 가까웠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키보드 위를 스치고 있었다.
"진실이 뭔지 알고 싶다면, 나를 막으려 하지 마."
이준호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범죄자의 변명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무언가 숨겨진 진실이 있었다.
며칠 후, 이준호는 민준과 마주했다. 민준은 호텔 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바깥의 불빛이 희미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그의 손끝에는 캡슐이 있었다. 캡슐은 목 뒤에서 희미한 푸른빛을 내며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너도 결국 같은 부류야." 이준호가 조용히 말했다.
민준은 캡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옳은 걸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민준은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필요한 걸 하고 있을 뿐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와 혼란, 그리고 어딘가 모를 슬픔이 섞여 있었다. 이준호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법과 정의의 이름 아래 많은 범죄자를 마주했지만, 민준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준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준호는 어두운 골목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한쪽 끝에는 서윤이 있었고, 다른 쪽 끝에는 민준이 있었다.
서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를 믿지 않아도 괜찮아. 난 진실을 찾을 거야.”
반면 민준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표정에는 미묘한 기대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준호는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선택이 모든 걸 바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건이 끝난 후, 이준호는 경찰청 옥상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멀리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민준과 서윤을 떠올렸다.
서윤의 차가운 미소, 민준의 흔들리는 눈빛.
그 둘은 서로 너무 달랐고, 동시에 너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둘과 엮여버렸다.
그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스쳤다.
아직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