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반 5주차
일찍 퇴근하겠다는 말을 어렵게 꺼내고는 가방을 들고 나섰다. 만원 지하철 내에서 누군가에게 발이 밟혔지만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시계의 숫자들을 멍하니 읽다가 급히 내려, 역사를 종종걸음으로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가방을 거실에 던져놓고 샤워실로 향했다. 아침의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바닥 위로 다시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물은 머리에서 어깨로, 그리고 온몸으로 흘러내렸다.
인스타그램에서 이준을 팔로우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우연히 추천 피드에 뜬 사진들에서 연보라색 새를 그린 타투 사진을 보았는데, 그 새는 마치 날개가 부러진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사진을 클릭한 이후로, 바둑판같은 정사각형 프레임 속 수많은 새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연둣빛 부리를 가진 허벅지의 작은 새, 누군가의 등을 가득 메운 펼친 날개의 새. 타투는커녕 피어싱조차 무서워하던 내가, 그제야 처음으로 새를 품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에게 DM을 받았다.
- 이번 달 예약 한자리가 비어요. 오실래요?
나는 단 한 번도 타투 예약에 대해 문의를 한 적이 없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조용히 매일 그의 피드에 ‘좋아요’를 누른 게 전부였는데.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제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 그러시군요, 그럼 천천히 새를 먼저 골라보실래요?
우리의 디엠은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이준의 인스타그램 스크롤을 내리며, 내가 원하는 새 사진들을 캡처했다. 그에게 그것들을 보여주며, 같은 새로 도안을 작업하는 것도 괜찮은지, 주로 이런 새는 어느 부위에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내가 어떤 새를 골라야 할지 주저하는 동안에도, 이준은 타투의 도안이나 바늘 대신, 새들의 생태학적인 특성에 대해 설명하거나 자신이 직접 찍은 오묘한 색을 가진 희귀한 새들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실, 진짜로 타투를 할 용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보내주는 새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졌을 뿐이었다.
- 내 등의 새는 윙스팬이 무려 100센티가 넘어요. 20년 동안 같은 둥지를 쓰는, 신뢰의 상징이기도 해요. 아프리카에서도 보기 희귀한 포식자거든요.
- 이 작은 새는 '난쟁이물총새'의 변종이에요. 고유색이 너무 아름다워서 타투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아요. 물속의 작은 물고기만 먹고살죠. 영역성이 어찌나 강한지, 자기 구역에 침범하는 걸 견디지 못해요.
어느샌가 우리의 대화에서 타투는 뒷전이 되었다. 새 백과사전에 나올 법한 지루한 정보들이 나를 매혹시켰고, 그가 다녀왔다는 세계 각국의 여행지 이야기는 내게 유튜브 시청을 대신했다. 나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휴대폰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대화를 나눈 며칠 만에, 이준이 물었다.
- 우리 만날까요?
샤아악.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바닥에 떨어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샤워실 선반의 여성용 제모기를 꺼내 들었다. 다리와 팔, 겨드랑이를 미끄러뜨리며 나는 그의 새를 품을 준비를 해나갔다. 뜨거운 물의 열기는 낯선 충동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젯밤 마지막 디엠에서 그에게 물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머스크향의 바디워시를 씻어 내렸다.
- 왜 타투를 사랑하게 된 거예요?
- 새들에게는 집이 필요하니까요.
얼굴도 모르는 그와의 만남을 위해 옷장을 여러 번 열었다 닫았다. 사무적인 원피스를 벗고, 보드라운 감촉의 하늘색 니트를 꺼냈다. 드러난 목 선에 어울릴 액세서리를 고르다 피식 웃었다. 소개팅도 멋쩍다며 늘 손사래를 치던 나에게, 디엠을 통한 만남이라니.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속에 뭔가 얹힌 것처럼 더부룩했다. 차가운 돌덩이가 내 속에 들어앉아 온갖 장기들을 누르는 통에 혈관들마저 수축된 것 같았다. 유리잔에 물을 따르는 손끝이 떨렸다. 꾸준히 먹던 마그네슘 병을 지나, 컵 속에서 올라오는 기포가 터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약속 장소인 양재역은 집에서 멀지 않았다. 이준은 내가 사는 동네로 오겠다며, 대신 식사 장소를 골라달라고 말했다. 우리 동네는 사실 타투를 하는 사람들과 그에 어울릴 법한 사람들이 갈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변 회사 소속의 중년 남자들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식당들이 주로 많았지만, 이준이 홍대나 이태원 구석의 트렌디함이 넘실대는 공간으로 나를 부르는 것보다는 지금 여기가 훨씬 낫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꼬르륵. 위장에서 벌써 신호를 보냈다. 매일 먹는 위장약을 무감하게 입에 털어 넣고 나는 집 밖으로 나섰다.